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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Aug 12. 2023

김치 한 가지에도 만족합니다

점심 값을 아끼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연령대의 직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집에서 먹던 반찬을 회사에서 도시락으로 먹는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늘 궁색하게 김치 냄새만 풍겼던 것은 아니었다. 월급날이 되면 콧바람을 쐬며 근처의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특별한 날로 정해서 먹는 것이니만큼 전골이나 파스타 같은 평소에 먹지 않은 음식으로 기분 전환을 하곤 했다. 


그렇게 도시락족이 된 지 20년이 넘었다.

회사를 옮기고도 도시락은 매일 싸갔고 다행히 바뀐 회사에서도 도시락을 싸 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딸보다 어린 직원들과 회사 얘기나 개인적인 얘기를 해가며 먹는 점심은 나쁘지 않았다. 간혹 누군가의 생일이나 대표의 법카 찬스가 있는 날은 힙지로의 맛집에서 색다른 맛을 즐기기도 했다. 회사 근처는 맛집이 많다. 꽤 유명한 곳에는 2~30분 기본으로 웨이팅이 있는 곳도 많다. 그런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한 번 맛본 것으로 만족하며 도시락을 꼭 챙기게 된다. 


두어 달 전부터는 혼자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추가로 입사를 하는 바람에 함께 밥을 먹던 장소가 좁아 사무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내가 있는 사무실에 작은 회의실이 있는데 손님 접대용 원탁 테이블이 있다. 그곳은 3~4명이 식사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2명이 추가 입사하는 바람에 그곳에서는 더 이상 점심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여직원들은 좀 더 넓은 회의실로 옮겨 점심을 해결했는데 나는 가지 않았다. 도시락 가방을 들고 다른 사무실까지 가기도 그렇거니와 우선은 혼자서 먹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함께 먹는 것이 불편한 건 아니지만 내 마음대로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이 좋았다. 각자 맛난 음식을 해와서 큰 양푼에 밥을 넣고 비빔밥을 해 먹기도 하면서 즐거운 추억도 만들었지만, 혼자 먹을 때는 내가 보고 싶은 유튜브를 본다거나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마음 편히 식사를 하게 돼서 더 좋다. 점심을 얼른 먹고 수다를 떨었던 지난 시간이었다면 이젠 근처 청계천으로 산책은 기본이고 중고 서점에서 제목을 읽어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명동길도 예전에 비하면 한산해져서 아이 쇼핑하며 걷기에 좋다. 


매일 똑같은 반찬이다. 집에서 먹는 반찬 회사에 와서도 먹는다. 언젠가 여직원 한 명은 이런 나를 보고 안타까워했다. 하루 한 끼라도 제대로 된 밥상을 마주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입장에선 궁색한 모양일 수 있다. 그러나 긴 줄을 버티고 순식간에 흡입하다시피 먹고 들어오면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황금 같은 점심시간을 도시락을 먹고 난 후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좋다. 내가 먹고 싶지 않은 메뉴를 임원분이 고르면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했다(한 임원은 오로지 면과 돈가스만 좋아하셨다). 밀가루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을 먹은 오후면 부글거리는 뱃속을 부여잡고 화장실을 들락 거리지 않아서 좋다. 매일 비슷한 반찬이지만 먹고 나면 속도 편하고 소화도 잘되는 도시락이 좋다. 



청계천의 산책도 폭염 때문에 힘든 요즘에는 회사에 몇 권 가져다 놓은 책이 반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내 도시락옆에는 매일 다른 책이 반찬으로 나온다. 매일 비슷한 반찬을 먹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작가의 손끝에서 지어진 맛있는 문장으로 인해 마음의 풍미가 그득하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컵라면에 김치 하나 얹어 먹으면 책 속의 긴 문장도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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