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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JOY]'살아갈 힘’을 되찾길

우리가 서로의 산이 되어서

by 샐리

#1. 소통을 위해


"소통을 위한 단절이라는 슬로건 아래, Museum SAN은 문명의 번잡에서 벗어나 자연과 문화의 어울림 속에서 휴식과 자유를 느껴 보기를 권합니다"


뮤지엄산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이 인사말은, 인간사는 잠시 잊고, 자연과 문화 속에 놓인 미술과 친구 해 보란 뜻 같다. 미술관 이름이 ‘SAN’이니까, 강원도에 있는 많은 ‘산’ 중의 한 곳을 등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사를 잊는 단절은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함께 가는 친구들이 좋아서 어디든 같이 가겠단 맘으로 떠난 길이라, 어떤 산이라도 우리는 분명히 엄청나게 ‘소통’ 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친구와 함께라면 어떤 산이든


나는 석 달 전부터 동네 친구 셋과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다. 공자께서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이 셋 모두를 내 스승이다 생각하니 있으니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 이들과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일정을 맞춰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간다는 사건은 내게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집에서 원주에 있는 뮤지엄산까지 약 2시간 정도 걸린단다. 우리는 새벽 7시 40분에 만나면, 미술관이 개장하는 10시에 얼추 맞춰 도착하겠다고 작전을 잤다. 나는 알람을 6시 40분에 맞췄다. 1시간 정도 여유면 아이들 등교와 남편 출근 준비까지 깔끔하게 해내고 나올 수 있겠지. 그런데 전날 밤, 나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이 첫 소풍에 마음이 들떠서일까? 아니면 여행에세이를 쓰자고 약속한 부담 때문이었을까? 결국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아침 어둠을 걷어내고 일어났다.



#3. 분주한 아침, 소풍 전야처럼


제일 먼저 아이들의 밥을 챙겼다. 전날 주문받은 대로, 첫째를 위한 볶음밥을 만들고, 둘째에게 줄 시리얼을 그릇에 담고 우유를 컵에 따라 두었다. 남편의 아침은 좀 더 준비 시간이 길었다. 전날 K언니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만든 단호박 수프를 먼저 데웠다. 고소하고, 달콤한 풍미가 기대 이상이어서 이 수프를 빨리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요거트를 볼에 담고 그 옆엔 그래놀라 봉지를 세워두었다. 토마토와 레드키위, 사과까지 깎아서 접시에 소복이 담아 랩을 씌우고, 무화과 캄파뉴도 2덩이 무심하게 잘라 완벽한 아침 정찬을 완성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은 벌써 7시. 며칠 전부터 어떤 옷을 입고 갈지 제법 고민했다. 우리는 동네 친구들이라 주로 편한 일상복 입고 만났는데, 이번엔 좀 특별한 외출이니만큼 다른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을이니까, 내게 온 지 16년이 되었어도 아직도 영국 귀족같이 깔끔하고 세련된 갈색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입자. 강원도라 좀 추울지도 모르니까 갈색에서 톤다운된 베이지색 보드라운 캐시미어 머플러를 두르고. 안에는 이번 생일에 남편이 ‘어디 갈 때’ 입으라며 사 준 버건디 원피스에 앵글 부츠까지 신으면 완성. 아 나한테 깔 맞춤 할 수 있는 버건디 버버리 핸드백이 있었지! 그리고 커피를 못 마시는 R을 위해 블루베리 차와, 내 커피까지 야무지게 만들어 보온병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애들도 등교할 때 춥겠지, 싶어, 핫팩에 마스크까지 아이들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려놓고 보니, 아이고, 벌써 약속 시간 15분 전! 일찍 일어났으니, 메이크업을 제대로 하고 가자 싶었는데, 선크림만 바르는 것으로 타협하고 후다닥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시동을 걸어 집합 장소인 J의 아파트에 간신히 약속 시간에 도착했다.





#4. 출발, 그리고 이야기들

뮤지엄 산을 가는 구불구불한 길

뮤지엄산에 두어 번 가 본 적이 있단 죄로 J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녀의 차 안은 달콤한 팝송이 흐르고 커피와 블루베리차 아로마가 가득했다. 우리들은 음소거의 순간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정신없이 말을 쏟아냈다. 아이들, 책, 문학, 골프, 글쓰기, 오늘 함께 오지 못한 Y의 이야기까지.


구불구불한 산길을 타고 가다 여기가 산 중간쯤인가 싶을 때, 뮤지엄 산 간판이 보였다. 도착해서 보니, 산 중간에 ‘뮤지엄 산’이 걸터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5. 악력이 느껴지는 김밥


최근 경기도로 이사 가서 자주 볼 수 없었던 K 언니가 미리 끊어놓은 입장권을 흔들며 반겼다. 딸의 소풍날이었다며 우엉 김밥을 아침으로 싸 왔다며 입장 전에 먹자 해서, 우리는 다시 차에 탔다. 김밥에 넣은 오이를 못 먹는 R의 식성까지 생각해 유부초밥까지 말아온 완벽한 K 언니. 하지만 김밥의 밥 설익었다! 전날 예약을 걸어둔 쿠쿠 압력솥에 고무 패킹을 깜빡 빼먹고 밥을 지었단다. 밥이 날아다녀 뭉쳐지지 않아, 악력으로 꽉꽉 눌러 말아 왔단다. 그녀의 악력이 느껴지는 우엉 김밥이 그렇게 맛있었다. 누가 내게 직접 김밥을 말아 건넨 적이 언제였던가. 내 영혼에 김밥 살이 올랐다. 나는 그러려고 여기 온 것이다.




#6. 미술을 몰라도 미술관은 좋다


우리가 ‘뮤지엄 산’을 선택한 것은 J 덕분이다. J는 일 년에 한 번씩 ‘뮤지엄 산’을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고 전에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 모두 부럽다며 한마디씩 했다. 박물관도 재미있겠지만, 고속도로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을 가족의 동의를 받고 홀로 갔다는 행위 자체가 부러웠고, 결국 집단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글쓰기 모임 세 친구는 모두 미술을 좋아하고, 조예가 깊다. 그에 비해 나는 주변에 미대 나온 친구도 없고, 미술 지식도 미천하며, 미술을 딱히 좋아하거나 싫어할 만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뭔가 배우고 느낄 것이 많을 것 같은 미술관, 박물관 구경은 좋아한다. 모순인가?미술은 잘 모르겠는데, 미술관 가는 건 좋아해요.’


매티턱 Mattituck house.

미술이란 그런 게 아닐까?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맘은 굴뚝 같지만, 내 말발이 좋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감정을 느끼고 싶지만, 대화 주제를 뭐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같은 상황에서, 미술이란 대화 주제는 옳은 선택이 되겠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 번쯤은 미술관에 가봤을 테니 말이다. 내가 최근에 어디 여행 다녀왔는데, 그곳에 박물관에는 교과서에서 봤던 작품들이 있더라, 들어는 봤는데 잘 모르겠다고? 있지, ‘피카소와 같은 급이야’라던가, ‘모나리자’ 같은 명작에 빗대어 설명한다면 얼마나 대화가 이어지겠는가? 백남준 작가는 들어봤지? 뮤지엄 산에 가면 백남준 작품관이 있어. 텔레비전을 막 쌓아놓고 예술 한다는 그 사람… 그리고 안도 다다오라고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건축 예술가인데, 강원도 원주에 미술관을 지어놨더라고. ‘SAN’이란 이름이 Space Art Nature의 줄인 말이라며 조금의 지식까지 보탠다면 금상첨화다.


Archway

예술가들은 알고 있지 않았을까? 저 멀리 이탈리아 파스타 펜네가 12M 높이로 시뻘겋게 입구에 서 있다. 작품 이름은 <아치웨이>.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창조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관람객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맥이 통하는 곳까지도 이어 질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말이다. 미술품들은 예술가들이 심어놓은 소통의 씨앗인가. ‘뮤지엄산’은 이 소통의 씨앗을 가져갈 장치를 해 놓았고, 그래서 작품에 집중하라며 단절을 요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우리를 만든다 love invents us



#7. 미로 같은 공간, 사람 사이 같은 연결



구불구불 이어진 뮤지엄 내부


뮤지엄산을 설계한 안도 다다오는 미술관 실내 곳곳을 미로처럼 꼬아 놓았다. 마치 길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다가도, 그 끝은 다른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람사이처럼 말이다. 미술에 대해 느꼈던 어지러움을 다소 해소하게 되었다. 나는 미술 작품을 그렇게 볼 작정이다. 따뜻한 저녁을 먹으며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무엇이 있는지를 찾아보는 심정으로 감상하겠다. 두 눈을 반짝이며 엄마 이야기를 들을 아이들을 상상하며.

미로 같은 길에도 소통은 끊어지지 않았다


#8. 안도 다다오의 부탁


안도 다다오는, 어른과 아이 모두 여기에 와서 하루를 보내면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져,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게다가 그런 자기의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했는데.


내 대답은.

"축하합니다, 성공하셨어요."


당신의 건축물안에서 친구들과 나눈 소통,

그리고 집에서 기다릴 아이들에게 나눠줄 뮤지엄 산 이야기들은,

제게 분명히 살아갈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뮤지엄의 마지막으로 코스로 명상관을 선택하자.

육체도 좀 쉬다 가시게-

*그림 설명: 빛의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명상관.

*사진 설명: 명상관은 뮤지엄의 공간과 예술, 자연을 영감으로 기획된 프로그램들로 풍부한 감성과 깊은 휴식을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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