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라는 미로를 걷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Rue des Boutiques Obscures)>는 이 질문에, 아주 독특하고도 감성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작가 특유의 몽상적인 언어 감각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그의 다른 글을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작가의 어투나 문체에 대해 의견을 덧붙일 주제는 안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스펠링이 같은 이름도 그 주인의 국적에 따라 달리 번역된다. Patrick이 영어권 이름일 때는 ‘패트릭’으로 번역되지만, 이름의 주인이 프랑스인일 때는 똑같은 Patrick이 ‘파트릭’으로 변신한다. 사실, 책을 읽기도 전에 Patrick이 ‘파트릭’이어서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250쪽이 넘는 긴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줄여서 이야기하면,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가 어두운 기억의 거리를 헤매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요즘 사람들이 기대하는 자극적인 추적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안개 자욱한 골목을 걷는 듯한 문체와 희미한 단서들을 따라 주인공과 함께 ‘이보 전진, 일보 후퇴’를 반복하며 느리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소설 도입부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기 롤랑’이다. 기억을 잃은 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사설탐정 위트가 ‘기 롤랑’이라는 이름과 탐정 사무소 조수라는 새로운 신분을 선물한다. 기 롤랑은 자신을 도와준 탐정에게 부탁한다. 탐정의 능력을 발휘해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달라고. 그러나, 탐정은 단번에 거절한다.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시오.”
주인공은 탐정 사무소가 문을 닫은 후에야 자신의 과거를 찾아 나선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후 탐정의 조수로 살아온 세월도 꽤나 길었다. 새롭게 손에 쥔 신분에 걸맞게, 수년 동안 살아온 방식대로 그냥 계속 살아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인간은 ‘지금’만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단단하게 딛고 설 발판을 확인해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도 그랬다. 자신의 과거를 뒤쫓던 주인공은 여러 이름과 맞닥뜨린다. 추적 끝에, 주인공은 자신이 남미 출신의 ‘페드로’이며 한때 자신에게 드니즈라는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희미한 이름들로 가득한 어두운 기억의 거리를 떠돌며 그는 뜻밖의 과거와 마주한다. 나치 시절, 프랑스에 불법 체류 중이었던 주인공은 몇몇 친구, 그리고 연인 드니즈와 함께 스위스 접경 지역에 숨어 지냈다. 평온했던 그들의 은신 생활이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국경을 넘게 해주겠다며 접근한 사기꾼 때문이었다. 그들의 꼬임에 넘어간 주인공은 연인과 생이별하고, 돈도 날리고, 결국 자신마저 잃고 말았다.
과거의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답게, 내용은 시종일관 희미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이정표 하나 없는 거리에서, 누군가 알아보기 힘든 손글씨로 적어준 종이만 보고 힘겹게 목적지를 찾아가는 듯한 여정이었다.
나의 총평은 “쉽지 않았지만,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요즘은 모두가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꿈꿀 새도 없이 현재에 코를 박고 살아간다. 오직 현재에만 몰두하다 못해 이제 모두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찰나에 전념하는 모양새다. 당장 하루를 즐겁게 살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자극적인 기쁨을 얻는 데 치중해 반성과 희망은 어느새 희귀해졌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고, 시대를 반성하고, 진짜 나를 찾아내려 애쓰는 이런 글이 상을 받는 걸까.
사실 큰 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 책이 무조건 훌륭한 건 아니다. 훌륭한 이야기가 되려면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건드려야 한다. 이 이야기는 기억을 찾는, 그래서 기 롤랑에서 프레디가, 프레디에서 다시 페드로가 되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빛나는 건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따라 자신의 존재를 재조립하는 과정이 매력적이거나 멋있어서가 아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침략에 저항해 끝까지 항거한 이미지를 강조하며 레지스탕스의 나라임을 자랑스레 떠벌렸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수작으로 꼽히는 건 프랑스가 내내 자랑스럽게 떠벌렸던 레지스탕스 정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독일 나치에 충성했던 프랑스 괴뢰 정부, 비시 정권에 대한 프랑스 인 작가의 반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어두운 기억들의 거리’로도 읽힌다. 감추고 싶었던, 그리하여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을 뿐 덕지덕지 먼지가 뒤덮인 흔적들을 따라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
이 책을 액면 그대로 한 남자의 ‘기억 찾기’ 여정으로 바라봐도 여전히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대체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이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본질적인 명제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는 기억이 없다. 현재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 배경을 찾을 수도, 이유를 알아낼 수도 없다. 남자는 분명히 생각하고, 틀림없이 존재하지만, 기억이 흩어져버린 탓에 온전히 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생각하기만’ 하면 인간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 그치기보다 좀 더 다채로운 개념과 만날 때 진정으로 채워진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기억을 잃은 한 남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기억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존재를 설명하는 서사다. 주인공은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해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처럼 ‘기 롤랑’이라는 이름을 붙들고 아슬아슬하게 기억을 걷는다. 모디아노는 기 롤랑의 여정을 앞세워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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