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외로움'을 치료하다 | 영국의 고독부 장관

'고독'이라는 전염병과 싸우는 나라

by morasafon

최첨단 기술로 세상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시대에 살면서, 오히려 세상과 단절된 기분을 느끼곤 했다.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달려보지만, 정작 삶의 의미는 희미해져 가고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두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곤 했다.‘모두가 점점 더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시대에,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은 어떻게 만들어 가는 것일까?’


영국 북부 지역의 Ranias(가명)는 이 질문들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알려주었다. 우연한 기회가 어떻게 인생의 빛나는 순간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 그리고 단절된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발견하고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연히 발견한 전단지 한 장, 공동체 라디오의 문을 열다

Ranias가 라디오 진행자가 된 계기는 정말 사소한 발견에서 비롯됐다.


“정말 우연히 시작됐어요.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데, 벽에 붙은 광고가 눈에 들어왔죠. 지역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에서 진행자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원래 음악을 좋아했거든요. 옆에 있던 남편에게 ‘나 저거 한번 해볼까?’ 물었더니, ‘그럼, 당연히 해야지!’ 하고 응원해 주더군요.”


새로운 도전에 늘 망설이는 성격이었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 지원했다. 교육 현장에는 10대 후반부터 70대 중반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가 서로를 격려하는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교육이 진행됐고, 마지막 과제는 직접 라이브 라디오 쇼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쇼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방송국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자신만의 쇼를 가져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Ranias의 영국 라디오 인생이 시작되었다.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는 한 달에 2번, 한 시간짜리 쇼를 친구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목소리로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것


그녀의 쇼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공동 진행자인 친구 Marshe(가명)의 존재 때문이다.


“제 친구 Marshe는 자폐를 가지고 있어요. 스스로는 자신감이 없다고 말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있어서는 정말 뛰어난 친구죠. 우리는 쇼에서 음악을 틀고, 이 지역의 여러 이슈에 대해 이야기해요. Marshe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 건강 분야에 대해 깊이 있는 정보를 나누기도 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친구가 자신의 질환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청취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질병이나 아픔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때 더 깊이 공감하고 귀를 기울여요. 정말 그래요.”


청취자들은 실시간으로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나눈다. Marshe가 이야기할 땐 Ranias가, Ranias가 이야기할 땐 Marshe가 이메일에 답하며 소통한다. 그들의 쇼는 흩어진 개인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서로를 연결하는 따뜻한 공동체의 장이다.



영국의 사회적 고립, 그 낯설지 않은 풍경


Ranias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현대 사회가 겪는 ‘고독(solitude)’의 문제로 이어졌다. 몇 해 전, 영국 정부가 ‘외로움 부처(Minister for Loneliness)’를 신설할 만큼 사회적 고립이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던 기억이 났다.


“맞아요, 영국에서는 정말 심각한 문제예요. 버스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아요. 심지어 이웃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단절이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고 고립감을 느끼게 하죠.”


그녀의 말은 낯설지 않았다. 한국의 대도시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던 풍경이 있었지만, 이제는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 속에 고립되어 서로를 투명 인간처럼 대한다.


Ranias는 사회적 단절과 경제적 어려움이 맞물려 영국 내 강력 범죄, 특히 칼과 총을 이용한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로를 단순한 ‘타인’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무뎌지고 폭력은 쉬워진다.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 작은 공동체


변화는 공동체 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Ranias의 라디오 쇼처럼 말이다. 그들은 방송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열리는 다양한 모임 정보를 적극적으로 알린다. 노년층을 위한 모임,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을 위한 모임, 십 대들을 위한 모임 등.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차를 마시고, 음식을 나누며, 대화를 통해 서로의 온기를 느낀다.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요. 코로나 이후로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서로 만나려는 의지가 더 강해졌거든요.”


거대한 시스템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그녀의 목소리와 마음을 나누는 작은 공동체가 풀어가고 있었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은 거창한 계획이나 치밀한 전략이 아닌, ‘우연히 발견한 전단지 한 장’처럼 사소하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올 수 있다. 그리고 의미 있는 연결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며, 종종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기도 한다. 우리는 그저 마음을 열고, 우연한 목소리에도 기꺼이 귀를 기울이면 되는 것 아닐지.



1. 자폐 스펙트럼 장애 (Autism Spectrum Disorder, ASD)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의 어려움,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 및 관심사를 특징으로 하는 신경 발달 장애이다. '스펙트럼'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이유는 증상의 종류와 심각성이 개인마다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자폐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사회적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이들이 가진 고유한 강점을 발휘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2. 영국의 외로움 문제 (Loneliness in the UK)

영국은 현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외로움’을 인식하고 2018년 세계 최초로 ‘고독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했다. 이는 외로움이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정신적, 신체적 건강 악화와 사회적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후 정부는 다양한 지역사회단체 및 자선기구와 협력하여 세대 간 교류 프로그램, 커뮤니티 카페 활성화 등 고립감을 해소하기 위한 국가적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외로움 문제 해결이 더욱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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