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무뎌졌습니다 | 영국 변호사가 일을 그만둔 이유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멈추는 용기

by morasafon

영국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변호사이자 법률 전문가. 안정, 명예, 그리고 전문성으로 상징적인 직업. 영국인 Sorain(가명)은 한때 모두가 선망할 만한 그 길을 걷고 있었지만, 스스로 그 길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이야기는 소위 ‘좋은 직업’의 이면에 가려진 영혼의 소진에 관한 것이었다.


죽음에 무뎌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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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까지 Sorain은 범죄 분야를 다루는 변호사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맡았던 업무는 사망이나 심각한 폭행 사건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정의를 세우는 일이었지만, 그 과정은 매일 비극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저는 늘 나쁜 소식들을 다뤄야 했습니다. 죽음, 성폭력, 폭력 같은 것들이요.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었어요. 그 일이 제 개인적인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거든요.”


매일 누군가의 죽음과 고통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삶. 처음에는 사명감이었을지 모를 그 일이,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그녀를 잠식했다. 감정의 보호막을 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그녀는 점차 무뎌져 갔다. 직업적 소진은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


결정적인 순간은 아주 사적인 일이었다.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슬픔보다 먼저 ‘아, 그렇구나. 안타깝네’라는 건조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죽음에 너무 익숙해져서, 가족의 죽음조차 저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어요. 그 순간 생각했죠. 이건 아니라고. 더는 안 되겠다고.”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마저 마비되었다는 자각. 그것이 그녀가 멈춰야 한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나를 지키기 위한 퇴사, 그리고 워라밸


퇴사는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선택이었다.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9시에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삶. 그 속에서 그녀는 돈과 안정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과감히 변호사직을 내려놓고, 직원의 권리를 다루는 부서의 관리자로 커리어를 전환했다. 새 직장은 이전보다 스트레스가 훨씬 덜했고, 무엇보다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지금은 9시에 출근해서 4시면 끝나요. 이전 직장에 비하면 훨씬 자유로운 시간이 많아졌죠. 워라밸을 찾은 거예요.”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에 맞춰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더 높은 곳으로, 더 안정적인 곳으로 가야 한다고 현재의 고통을 감내했던 Sorain. 그녀의 선택은 단순히 직장을 옮긴 것이 아니었다. 일의 정의를, 나아가 삶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과정이었다.


가장 완벽한 때에 찾아온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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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의 삶의 전환은 또 다른 큰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바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것이다. 현재 7개월 된 딸아이는 계획에 없던 선물이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내가 아기를?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라며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는 가장 완벽한 순간에 찾아와 주었다. 만약 여전히 과거의 직장에 있었다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로운 직장에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찾은 지금, 그녀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일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완벽한 때에 일어난다고 믿어요. 제 딸이 제게 온 것이 바로 그렇죠. 아이는 저를 더 인내심 있는 사람으로, 더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줬어요. 예전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걸 싫어했는데, 이젠 누군가 ‘아기 2시간 봐줄까?’라고 하면 ‘네, 제발요!’라고 말하며 낮잠을 자러 가죠. 제게 딸은 완벽한 타이밍에 와준 거예요.”


그녀는 자신을 잃어가던 길에서 스스로 멈춰 섰고, 인생은 가장 완벽한 때에 선물을 보내왔다. 계획에 없던 그 길이 그녀에게는 가장 완벽한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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