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不在)2

홀로서기 중

by 모래쌤


남편이 갑자기 내 곁을 떠나 본향으로 돌아간 후 나는 왜 나냐고 왜 나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복잡한 일들을 처리하라고 하고 그는 데려가셨냐고 원망했고, 세상에 크나큰 사건과 사고가 너무 많아 내 문제는 다 안 살펴주시는 것이냐며 서운한 마음이었다. 혹시라도 먼저 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들은 척도 않고 가버린 그에게, 이제는 없는 그에게 화를 냈다.

그동안 운영하던 교습소에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폐업했다. 그리고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시작했다. 무슨 정신에 그렇게 일을 저지르나 하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으나 정신이 없어서 저질렀다. 그의 흔적 속에서 숨이 막히는 기분을 계속 느끼기 어려웠고, 마누라 무서울까 봐 늦은 시각이면 와서 대기하고 있던 그가 자꾸 보여서 앞뒤 없이 뛰쳐나왔다. 그러다보니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미리 나오는 바람에 월세도 몇 달을 더 냈고, 보증금 정리도 뒤늦게서야 끝났다.






원래 그 자리에 교습소를 낼 때 건물주가 참 인간적이라고 소문이 나서 마음 놓고 들어갔던 곳이었다. 그런데 재작년 건물 주인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법인이라던데 부동산에 위임해서 임차 계약서에 새로 다 도장을 받아 갔었고, 그 후 명절 때마다 직접 선물 돌리던 착한 임대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곧 임차료가 인상될 것이라는 소문만 흉흉하게 나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올 초 남편을 보내고 한 달 만에 돌아와 보니 임차료가 인상되었다는 안내장이 문틈에 꽂혀 있었다. 건물 임차인들이 아우성들을 했다고는 하나 착한 임대인이었던 먼저 주인이 코로나 때 임차료를 동결해 놓았던 탓에 우리 건물이 그 동네에서 제일 임차료가 낮다고 어쩔 수 없이 오를 것이라고들 했다.






계약 당시 남편은 특약사항을 넣어달라고 요구했었다. ‘임차인은 계약기간 만료 시 원상복구 한다.’라는 부분에 ‘단, 현재 천장과 바닥, 교실 칸막이는 원상복구 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명시해 달라는 것이었다. '원상복구'라는 말 자체가 원래 받았던 대로 해놓고 나가라는 것인데 뭘 저렇게 따질까. 당연한 건데 저렇게 꼭 쓰라고 하고. 오히려 주인 보기가 민망했다. 뭐든 좀 좋게 멋있게 처리하지 않는 것 같은 남편을 속으로 비웃었다. 중개사가 난처해하면서 주인에게 이야기 꺼냈고, 착한 임대인인 먼저 주인은 흔쾌히 우리가 하자는 대로 해 주었다.

그렇게 썼던 계약서가 이번에 단단히 역할을 한 것이다. 내가 임차 종료 관계를 묻는 전화를 하자 새 주인은 이렇게 답했다.

"계약서 살펴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러더니 감감무소식으로 며칠을 기다려도 답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계약서 살펴보셨나요?’하고 문자를 보냈다. 새 주인은 다음날에야 ‘원상복구 하시고 계약만료일에 나가시면 됩니다’라고 간단한 문자메시지로 답을 해 왔다. 옆에 음악학원이 있었는데 원장님이 이런 말씀을 해 주신 적도 있었다.

“주인이 원상복구를 하라고 해서 위에 필라테스도 다 털고 나갔대요. 그렇게 내보내고 월세를 엄청나게 올

려 내놨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가 기억나면서 갑자기 심장이 떨려왔다.





원상복구? 계약서를 다시 살펴봤다. 특약에 있는 그 문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금융 관계나, 부동산 관련 이야기는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 주어도 들을 때뿐인 내게 이런 일을 하게 하다니. 또다시 그의 부재에 화가 났고, 슬펐다. 용기가 나지 않아 계약 만료 일까지 서류만 들여다보고 설마 별일 없겠지. 별일 없을 거야. 정신 승리로 버티며 찜찜한 그 부분을 더 따져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새 주인은 건물을 매입하고 각호의 임차인들에게 계약서를 새로 받아 갔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봤다고 한들 나는 먼저 주인과 계약기간이 남아있는 상황이었으니 이런 경우는 조건을 바꿀 수도 없었을 것이다.

드디어 계약 만료 시점. 짐을 다 빼고 말끔하게 청소까지 끝냈다. 복도에 게시물을 떼 내고 나니 흉물스러워 기다란 복도를 수십만 원을 들여 보수까지 했다. 이 정도면 나는 정말 양심적이라고 생각했고, 주인에게 당당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 주인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내 초라한 모습이라니. 급기야 주인의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가서 봤는데요, 이렇게 하시면 안되고, 원상복구하고 나가셔야 해요. 그 위에 필라테스처럼 하시면 됩니다.’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갯불이 번쩍였다.

‘올 것이 왔구나. 아. 왜 하나도 이렇게 순조롭게 해결되는 일이 없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고, 싸움하는 법도 잊은 지 오래인데 어쩌지? 내가 혼자 있다고 다들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인가. 이때야말로 싸워야 할 때인가?’ 남편의 뒤에 숨어서 보낸 세월이 나를 더 바보로 만들어서인지 남자들과 통화하려면 왜 그렇게 목소리가 쪼그라들기만 하는지. 손발이 덜덜 떨리고 가슴이 조여와 심호흡하였다. 그의 부재가, 나의 홀로 있음이 그토록 실제적일 수가 없었다.





우선은 ‘원상복구요? 계약서대로 원상복구 하는 것 아닌가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하고 문자를 보낸 후 부동산중개업을 하시는 블로그 지인께 문의를 드렸다. 싸우면 안 된단다. 무조건 사정하는 편이 빠른 해결 방법이라고. 법적으로 내가 수그리고 들어갈 필요가 있는가? 논리적으로 이게 말이 되나? 생각하는 내내 떨리고 불편했던 내 마음이 오히려 편해진다. 그래, 내가 잘하는 걸로 하자. 어차피 주인의 말대로 해 줘야 끝나는 일이라면 사정을 하는 편이 더 쉽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심호흡하고 주인에게 전화했다.

안 받는다.

휴. 문자를 보낼까?

장황하게 문자메시지를 써 보내려는 찰나였다. 전화가 들어온다.

“여보세요”

“아. 네. 제가 전화 안 받은 게 아니라 허허허 통화 중이었습니다. 허허허.”

전화기 건너에서 무섭게만 느껴지던 새 주인이 웃는다. 목소리가 부드럽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그는 계약서를 제대로 못 봤다는 것. 자기 도장이 떡하니 찍혀있더라는 것. 계약서대로 하시면 되겠다는 것 등을 이야기하며 연신 허허허 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앞에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굽신거리며 감사하다고 했다. 걱정하던 그 일이 깔끔하게 해결된 것이다.





계약서 정말 잘 써야 하는구나. 당시에는 왜 저렇게 피곤하고 사람이 잘아 보이게 저러나 했는데. 그 한 문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옆에 있었으면 잔소리 엄청나게 들었을 텐데 다행이다. 자기 아니었으면 어쩔뻔했냐고. 너희 엄마 그때도 계약서 쓸 때 옆에서 얼마나 눈치를 줬는지 아냐고. 또 손해 볼 뻔했다고. 혼자 둘 수가 없다고. 어딜 가나 호구 잡힐 행동만 한다고. 자기가 한 일로 인해 뿌듯해하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놨을 텐데.

알았어. 고마워. 맞아. 당신 아니면 안 되지. 듣다 듣다 끝내 그만 좀 하시지? 슬슬 화가 올라와 째려보았을 텐데. 다행인가? 그가 없으니 잔소리도 없는데 좋지가 않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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