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不在)1

그가 없다

by 모래쌤


카뮈의 ‘이방인’의 첫 문장이 나의 문장이 되었다. 남편이 죽었다. 남의 이야기는 슬픈 사연이지만 나의 이야기는 현실이므로 이것은 더 이상 이야기가 아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뫼르소가 평소처럼 데이트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도 하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던 시절도 있었는데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나도 그렇다.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일도 한다. 실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놀라운 경험이다.

그는 단 한번의 뇌출혈로 고인이 되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운동을 하러 간 그가 그렇게 꼼짝없이 누워만 있는 모습을 보며 내 머릿속은 멈춰 버렸다. 그날 갑자기 일어난 그 사건에는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 어떤 표지도 계시도 경고도 없었다. 그냥 일어났다. 끔찍하고 슬프지만 지나가는 뉴스일 뿐이었던 각종 참사들과 참혹한 전쟁의 현장에서 울부짖는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들의 일이 나의 일이 되었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 날마다 멍했다. 나를 제외한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나의 세상은 거꾸로 뒤집혀 있었고 모든 걸 새롭게 보아야만 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내 앞에 있었다.





그는 딱 중간. 특별한 이벤트도 할 줄 모르는 투박한 사람, 낭만이라든가 멋이라든가 하는 것도 그 사람과는 안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딱 중간. 그렇게 눈에 띄지 않게 살던 그가 이런 큰 이벤트를 하고 갈 줄이야.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 그는 이미 그가 아니었다. 그는 병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그를 여러 건장한 구급대원들과 응급실 의사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계속 분주하게 뭔가를 시도하는 듯했다. 얼음이 되어버린 나를 쳐다보는 그들의 눈이 불안한 듯 아니 조금 미안한 듯했던 것 같다.

대학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동의를 하란다. 내가 오기 전에도 두 번의 심폐소생을 했고 심장은 뛰고 있으나 가는 도중 또 심정지가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대체 무슨 말이지? 멍하던 그때 그의 발이 보였다. 한쪽은 양말이 신겨져 있었는데 한쪽 발은 벗었다. 추울텐데. 양말이 왜 없지? 안 보인다. 평소에도 발관리는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 발이 뽀얗고 아담해서 그나마 덜 부끄러워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양말을 신기고 싶어 마음이 바빠졌다. 양말만 신기면 그의 몸이 따뜻해지며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나의 눈은 양말을 찾느라 허둥댔다. 하지만 양말 한 짝은 보이지 않았고, 그는 조용하기만 했다.

대학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그의 차가운 발을 감싸고 계속 기도했다. 아니 발을 감싸고 울었다. 그와의 이런 식의 이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 그런 미래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도착한 대학병원에서 그가 들어간 방은 ‘소생실’. 이런 곳이 다 있었나. 그곳의 의사들은 더 우왕좌왕했고, 애꿎은 심장에 전기충격만 가했다. 양말을 좀 신기면 안되겠냐는 나에게 응급실 의사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 자리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들의 처분에 남편의 거취가 정해지는 것이라니.

남편은 그렇게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생애 최대의 이벤트를 벌이고는 계속 가고 있었고, 끝내 나만 남겨 놓았다. 이제 그가 없다.

“내가 먼저 갈 거야. 나 당신 가는 것 못봐. 나 혼자 어떻게 살아. 겁쟁이가. 나 외로움도 엄청 타는데. 언니는 천국에 동생은 미국에. 나 친구도 별로 없잖아. 절대 안돼. 건강 잘 챙겨. 아프기만 해봐.”

“어떻게 할 건데 아프면? ”

“몰라. 버릴거야. 그러니까 절대 아프면 안 돼.”

이렇게 내가 닦아세우기라도 하면 남편은 껄껄거렸다. 무서워서 절대 아프면 안 되겠다며. 옆에 있었으면 당장 욱대기며 그를 몰아세울텐데 그가 없다.






나와 아이들은 평소 그가 원했던 대로 장기기증을 결정했다. 그 어렵고 힘든 일들을 그는 나한테 떠넘기고 갔다. 품위있고 멋진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장기기증은 멋지지 않았다. 뇌사판정 받고 장기기증을 결정 했지만 막상 그 과정은 견디기 힘들었다. 장기기증원 담당자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닥싸귀처럼 달라붙는 것 같아 싫었고, 친절을 가장한 흡혈귀처럼 보여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아직 몸이 따뜻한 그를 수술실로 들여보내야 할 때는 다 관두고 싶었다. 지금도 장기기증센터에서는 시시때때로 무슨 행사를 안내한다, 자녀에게 장학금을 주겠다 연락을 하지만 나는 전화를 피한다.






운동하러 나갔던 그를 그렇게 보내는데 열흘도 안걸렸다. 결혼하고 22년동안 혼자 무슨 일을 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어렵고 무서운 그 일들을 나혼자 했다.

“건강 잃으면 다 잃는 거야. 여보. 몸좀 챙기며 일해.”

가기 사흘 전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당신이나 잘 챙길 일이지. 이게 뭐냐고.’ 한바탕 퍼부어주고 싶은데 그가 없다.




8년 전 일이다. 언니가 오래 당뇨를 앓다가 갔다. ‘내일 갈게.언니’ 했지만 언니에게 내일은 없었다. 살아있었던 존재들이 항아리에 담겨 칸칸이 자리하고 있던 거기, 언니의 옆 칸에 아주 어린 아이의 사진과 그 아이의 출생과 사망 날짜를 보았을 때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가는데 순서 없다’는 것이 진짜였다는 것과 ‘내일 보자.’라는 말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 후 나는 언제 또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가족 중 가장 유력한 다음 순서는 팔순을 훌쩍 넘으신 부모님이려니 생각했다. 빈틈없이 부모님을 잘 섬기려 했고, 아직은 어렸던 아이들을 챙기느라 나의 현재를 사용했다. 나와 남편은 항상 모든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것인데, ‘가는 데 순서 없다.’는 사실을 그새 새까맣게 잊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그만 아차차 하는 순간 남편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겪은 이들의 애도의 과정이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로 진행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순서가 맞나? 내가 잘못한 건 아니라고 타협하기도 했다가 믿을 수 없어 부정하다가 신의 섭리를 믿어야지 수용한다. 그러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냐며 분노하기도 하고, 아니야 그냥 사고가 일어난거야 타협하기도 한다. 요즘은 그저 극적인 상봉을 상상하거나 막연한 두려움에 우울한 순간이 더 많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아무래도 순서가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요즘 나는 출근할 때 혹시 다시 못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스쳐 다시 한번 집안을 돌아보게 된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 번에 전화 연결이 안 되면 어 무슨 일이지? 갑자기 심장이 쿵쿵거리고 겁에 질린다. 한동안 어딜 좀 다녀왔다며 ‘짠’하고 나타나 나를 기쁘게 했던 어느 날 밤의 꿈이 현실이 되진 않을까 두서없는 생각에 오도카니 앉아 밖을 내다보기도 한다. 무서울 땐 얼른 남편에게 연락하면 됐었는데. 그 옆에 붙어 있으면 덜 무서웠고, 뭐든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하는 그가 나를 화나게 했겠지만 안심도 되었을텐데. 이제는 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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