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F라는 소리를 들어온 나에게
두 아들들이
"엄마. F 아니야. 엄마 T예요. 눈물 많은 T"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절절히 공감하고,
에너지를 쏟아 그들을 위해
내 시간을 쓰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나는 늘
내 일이 우선이었다.
남편도 늘 그 점을 서운해했었는데......
/
초등학생 시절 몸이 약했던 나는
비쩍 마른 애가 머리만 커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지럽다고 호소하면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쟤가 저러는 거 아닐까
하는 나름 논리적인 주장을 하셨었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종합검사를 받게까지 되었는데
거기 의사 선생님 최종 진단
" 어머니, 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그런 욕구가 강하거든요. 뭐든 하겠다고 하는 걸
막지 마시고 되도록 하게 해 주세요."
이게 무슨 비과학적인 이야기지?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돌이켜 보니 아마도 심리검사 같은 것도
했었지 않았을까 싶다.
/
엄마의 통제 아래 있던 시절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아팠다.
주로 어지럽거나 두통이 있는 것이었고
한의원을 봄가을로 다니며
약을 대 먹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잘 다린 약을 한 회분씩
비닐 파우치에 담아주는 것이 아니라
종이에 싼 약을 꾸러미로 주던 시절
엄마는 그 약을 다리고 짜서
때마다 주었고
처음엔 쓰다고 투덜댔으나
나는 어느새 한약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또 돌이켜 보니
어린 시절처럼 골골하지 않는다.
그게 한약 덕분이라기보다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기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 비해 20대가
20대보다는 결혼 후
몇 백배 더 힘들어졌음에도
나는 감기도 잘 안 걸리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
기억력이 없는 내가.
어릴 때 만난 의사 선생님의 그 말이
안 잊히는 건 왜일까.
아마도 그 말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리라.
내가 원하는 걸 좀 하게 내버려 두라는 것.
그래서 나는
"안돼!"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 제일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하겠다는데 왜 안 된다고 하냐 이거지.
/
결혼 후에는
내 마음대로 뭐든 할 수 있어 좋았다.
더 편하게 저질렀다.
남편이 때때로 엄마처럼 나를 향해
"안돼"라고 말해서
서서히 나는 묻지도 않고
일을 저질렀고,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일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대부분
에너지를 쏟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었기에
몸은 힘들었지만
하고 싶으니 그냥 했었다.
/
핑계는 있었다.
엄마 아버지도 챙겨야 하고,
사역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가족의 경제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그래서 내가 희생하는 거야. 뭐 그런 프레임
하지만
희생해 온 것처럼 보이는 이 삶을
실은
즐겼던 것 같다.
나 아니면 되겠어?
내가 해야지
뭐 이런 생각으로....
그래서
나는 너무 힘든대도
보는 사람들마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 한 걸까?
/
남편이 주님 곁으로 떠난 후
나는 더 일에 파묻혔다.
그게 내가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인들이
어쩌다 내 얼굴을 보면
"얼굴은 좀 나아지신 것 같아요.( 작년 그 당시 보다)
좋아 보이세요."라고 말하나 보다.
슬픈 척하며 실은
내 일에 파묻혀 신나게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정말 가증스럽다.
/
오늘은 주님께서도 예배시간에
나에게
주님께 받은 사랑의 힘으로
아들에게 빛을 비추라 하셨다.
내 유일한 방패라고 여겼던 남편도 데려가시고는
어쩌라고 그러시는 건지
내 편은 아무 데도 없는 것 같다.
원래도 뭐 주님이 내편이시기보다 남편 편이셨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정말 T 라면
T 답게
생각하고
할 일을 하자.
아들들에게 쏟을 시간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만들 수 있어.
시간은 만들면 만들어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