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단 1
20세기 남성복식 문화에 관한 남은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전에, 이 시점에서 수트의 제작 과정을 잠시 살펴보려 한다. 호주, 뉴질랜드 목초지의 양에서부터 비스포크 테일러의 손에 의해 완성된 수트까지의 전 과정을 살펴볼 계획이다. 부득이하게 이제껏 설명 없이 남용됐던 테일러링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다.
울의 여정을 서술함에 있어서 용어들의 사용은 전적으로 영미식 표현을 따를 계획이다. 계속해서 사용해온 복식 관련 용어들의 대부분이 영어이기에, 그것이 더 일관적일 테다. 누구나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내가 서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상세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겠지만, 오직 테일러링이라 불리는 예술의 향유를 위한 공부로서 양모가 원단으로, 원단이 수트로 변모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이 의미가 있으리라 믿는다.
비스포크 수트 오더를 위해 테일러를 찾은 고객은 원하는 수트의 기본적인 사항을 명시한 후, (더블브레스트, 싱글브레스트, 여름용 수트, 가을용 수트, 등등) 원단의 선택을 위해 각종 번치 북과 빈티지 원단 샘플을 맞닥뜨리게 된다. (테일러가 고객을 호텔 등의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트렁크 쇼의 경우, 고객은 손바닥 크기의 원단 샘플만을 보고 원단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독일의 스타일 작가 번하트 롯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스포크 수트를 판매하는 테일러를 두고, ‘공기를 파는 존재’라고 말한다. 테일러에게 오더를 진행하는 고객에게 있어 완성된 수트에 대한 현실감을 제공하는 것은 눈으로 확인한 샘플 원단의 직조와 색감,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그것의 촉감뿐인 것이다.
운이 좋다면 테일러를 그의 샵에서 직접 방문하는 경우, 가게에 보관된 원단들을 필째로 몸에 감아볼 수도 있다. 새빌로 하우스들의 경우, 이웃하고 있는 Holland & Sherry 매장에서(Holland & Sherry 원단을 선택했을 경우) 원단을 살펴보는 일을 권유하기도 한다. 나폴리 시내에 자리한 Caccioppoli 원단 매장 역시 나폴리의 사르토리아에서 수트 오더를 진행하는 고객이 자주 방문하게 되는 곳이다.
피렌체의 Liverano & Liverano, 나폴리의 London House, 파리의 Cifonelli 등의 저명한 테일러 하우스들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원단 아카이브를 보유하고 있고, 이들이 보유한 빈티지 원단은 테일러들의 탁월한 솜씨와 하우스 스타일의 매력과 함께 많은 고객들로 하여금 그들을 찾게 만들고 있다.
고객 입장에서 선택 가능한 원단의 수는 다다익선일 듯하지만, 수트를 주문하는 남성이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선택지 앞에서 당황하게 되는 일 역시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가장 기본적인 추동용 네이비 싱글-브레스트 수트에 알맞은 원단을 선택하는 일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다(달리 말하자면, 지나치게 많은 ‘알맞은’ 원단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남성들을 돕기 위해 양복점들은 보통 이탈리안 원단의 특색, 영국 원단의 특색, 수가 높은 원단의 장단점들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제공한다 (이탈리아 원단은 내구성은 떨어지지만 발색이 좋고, 광택이 좋다... 영국 원단은 내구성이 좋고, 보온성이 탁월하다... 등등...). 그러나 남성복 업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술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 원단 업계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판매사, 원단사, 직조사, 원산지 등을 고려하지 않은 이탈리아 원단, 영국 원단에 대한 두루뭉술한 설명은 원단의 품질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일관성 있는 기준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비스포크 수트 제작 과정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 고객이 따라야 하는 원칙은 “테일러는 옳다”이다. 원단 선택 과정에 있어서 유능한 테일러는 나의 체형, 재단-재봉되어야 할 수트의 특성, 원단의 질감과 색상이 줄 효과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내게 맞는 원단을 추천할 것이다. (실력 없는 테일러를 선택했다면, 최고의 원단을 선택하는 일 역시 당신을 구해줄 수 없다)
따라서 원단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수트를 주문하는 일반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은 제한적이다. 우리는 테일러에게만 가능한 '총체적' 이해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그 예로 어떤 옷감이 바느질에 용이한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미세한 감각과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향유하는 일이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듯이, 한 명, 혹은 여럿의 장인이 60-90시간의 시간을 쏟아부어 만든 아름다운 수트의 진가를 제대로 인식하는 일에도 만만치 않은 공부가 요구된다. 난 오로지 테일러링의 예술을 향유하는 일에 최대한 일조하기 위해 원단 공정의 모든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려 한다.
쓰리 피스 수트의 탄생 이후 수트의 모양새는 다양한 변모 과정을 거쳐야 했다. 수트용 원단의 소재 역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캐시미어, 모헤어, 앙골라 울, 알파카, 라마, 친칠라, 비큐나, 실크, 리넨, 코튼). 그러나 오늘날에도 수트를 대표하는 소재는 역시 양모인 울이다(물론 알파카, 캐시미어, 카멜 헤어 등 염소/라마 털 역시 경우에 따라 울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양모만을 다루도록 한다).
최고급 수트를 위한 여정은 메리노 양(merino sheep)에서부터 시작된다. 1760-1820년(영국 조지 3세 집권 시기)경에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수입된 메리노는 오늘날까지 최고급 양모인 메리노 울을 위해 사육되고 있다. 메리노는 건조한 기후에서 가장 이상적인 활동을 보여주기에, 오늘날 고급 수트 원단용 메리노는 뉴질랜드와 호주의 목초지에서 방목된다. (유럽에서도 메리노는 발견되지만, 유럽의 기후는 메리노 방목에 적합하지 못하다)
메리노는 대체로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털을 깎게 된다. 한 마리의 메리노 양에게서 깎여 나오는 털의 양은 5 킬로그램에 달하는데, Fleece라 불리는 이 양털 옷은 우선적으로 털의 부위와 길이에 따라 나뉘어서(엉덩이, 다리, 목, 배 등) 보관된다.
메리노 울은 섬유 당 약 5-15센티 사이의 털 길이를 보인다. 양모 섬유의 굵기는 한 마리의 양에서 깎여 나온 털 사이에서도 일정하지 않으나 소모사 혹은 방모사 수트 원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양털은 섬유의 지름이 27 마이크론보다 얇은 fine wool 뿐이다. 1마이크론은 1/1000 밀리미터를 의미하는데, 인간 머리카락의 지름이 약 50 마이크론이다. 지름이 20 마이크론을 밑도는 울 섬유는 Superfine wool로 분류되며,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부드러운 동시에 특유의 광택을 보여주는 고가 원단들의 원료로 쓰인다.
(보통 27 마이크론을 초과하는 두께의 울 섬유는 다리, 배, 목에서 나온 양털과 생활 오염을 포함한 각종 오염에 노출된 부위와 함께 카펫, 펠팅, 거름 등의 용도로 사용된다.)
막 깎여 나온 양모는 Greasy wool이라 불린다. 양모 특유의 지방인 양모지 뿐만이 아니라, 생활오염에 따른 이물질이 Greasy Wool에는 상당량 포함돼 있다. 메리노 양모에는 다른 양모보다 더 많은 양의 양모지가 함유되어 있는데, 그것은 깎아낸 털 무게의 30%에 달한다. 이와 같은 기름은 방수 효과를 통해 메리노들을 보호하는 탁월한 효과를 보여주지만, 채취된 양모를 양모지가 가득한 상태로 방치하게 되면 (특히 울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면) 곰팡이, 혹은 악취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양모는 간단한 세정 과정을 거치게 된다. (판매된 이후에 세정되는 경우도 있다).
이제 최고급 메리노 울은 경매를 통해서 양모 상인들에게 판매된다. 이렇게 판매된 울은 이제 원단으로 거듭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나게 된다. 유럽에 도착한 후, 울 Fleece는 다시 한번 섬유의 품질, 길이에 따라 분류되고, 그 후 Picker라고 불리는 기계를 통해 양모 locks (clumps) 뭉치로 변모하게 된다. Picker는 가시로 가득한 롤러들로 이루어진 기계로, 꽁꽁 엮여있는 양모를 한 올 한 올 분리시켜 사이사이에 껴 있던 이물질을 제거하고, 엉켜있던 양모를 늘어뜨려 조금 더 균일한 상태로 정리시킨다. 뭉쳐 있는 솜을 양손으로 잡아당겨 엉킨 솜 사이에 낀 이물질들이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동시에 솜을 구성하는 섬유들을 하나하나 분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무관하다. (가정에서 소규모로 직접 울 방직에 임하는 농부들의 경우, Picking 과정을 손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Picking을 마친 울은 이제 전통적으로 Scouring이라 불리는 세탁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방직 과정 이후에는 기름과 오염을 제거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 지기에, 이 단계에서 세탁은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오염과 양모지를 섬유에서부터 제거하기 위한 꽤나 철저한 세탁이 이루어지게 된다.
전 세계를 통틀어 양모를 세탁하기 위해 가장 널리 사용되는 scouring machine은 Leviathan이라 불리는 공포스러운 이름의 거대한 세탁기다. 무려 65미터의 길이를 자랑하는 이 괴수는 3-8개의 큰 탱크로 구성돼 있다 (메리노 울을 세척하는 기계들의 탱크 수는 보통 5-6개다). Leviathan에 투입된 양모 뭉치(clumps)들은 5-6개의 탱크에서 반복되는 세척 과정을 거친다. 보통 양모는 각 탱크 안에서 65도의 온수에서 세척되는데, Lanolin(양모지)은 45도에서도 용해되지만, 더 높은 효율성을 위해 65도 온수가 사용된다. 하나의 탱크에서 세척이 끝날 때마다, 사용된 물이 측면에 위치한 사이드 탱크들로 배출되고, 울은 탱크의 끝에서 커다란 스퀴즈 롤러/벨트에 의해 강하게 짓눌려 물을 쏟아낸 후, 다음 탱크에서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같은 사이클이 5-6번 반복된 후, 마지막으로 헹궈진 양모에는 ‘Spinning oil’ (방직 오일)이 뿌려진다. 이는 앞으로 있을 Carding과 Spinning 과정을 위해 울을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조치다.
이렇게 라놀린과 오염을 제거시킨 울은 우리에게 익숙한 흰색을 띠게 된다. 이제 Carding이 시작될 차례다. Carding은 쉽게 말해 엉킨 양모를 펴기 위한 빗질과 다르지 않다. Carding Machine은 수백만 개의 미세한 바늘들이 달린 회전하는 드럼통들로 구성돼 있다. 그들은 각자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양모를 잡아당기는 거센 빗질을 반복하는데, 이것은 엉킨 양모를 각개의 섬유로 분리해주는 동시에, 양모 사이에 낀 이물질들을 제거한다. 이렇게 단정하게 빗어진 양모 뭉치는 이제 또 한 번의 분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최고급 Merino 울은 이 시점에서 두 종류의 각기 다른 상품으로 나뉘게 된다. 포멀한 수트용으로 제작되는 우스티드(Worsted)와, 부드럽고, 조금 더 거친 질감을 선사하는 방모(Woolen)가 그것이다.
샤프한 우스티드 수트용 옷감과 기모감이 느껴지는 스웨터, 플란넬, 트위드용의 방모사 옷감 사이의 확연한 차이는 공정 과정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Fine Wool은 여기서 각각 소모사와 방모사로 분류된다.
Carding 과정을 끝마친 양모는 이전과 비했을 때 훨씬 더 균일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미세하게 관찰했을 때 여전히 각각 다른 길이의 섬유들이 엉성하게 뭉쳐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각각의 섬유 사이에는 공간이 자리하며, 따라서, 빗질 후 부풀어 오른 머리처럼, 풍성한 모습이다)
보통 Worsted 옷감에 사용될 울과, Woolen 옷감에 사용될 울의 차이는 양모 섬유의 길이에 따라 결정된다고 알려져 있다. 샤프한 우스티드 옷감을 제작하기 위해선 보통 5cm 이상의 길이를 가진 양 섬유가 사용되고, 우스티드에 비해 거친 촉감이 특징인 방모사에는 일반적으로 5cm보다 짧은 양모 섬유가 사용된다. 그러나 섬유의 길이는 둘 사이의 차이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트위드 옷감을 만드는 Woolen 방적공은 5cm보다 훨씬 더 긴 양모 섬유를 사용하고, Fine Botany Worsted 옷감을 만드는 우스티드 방적공은 비교적 짧은 5-10cm의 양모를 사용한다. Woolen 옷감의 실과, Worsted 옷감의 실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 요소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정 과정의 차이이다.
Carding 과정을 거친 Worsted용 울은 방모사용 울에겐 요구되지 않는 한 차례의 공정을 거쳐야만 한다. 바로 Combing이라고 하는 빗질 과정인데(Picking-> Carding-> Combing의 세 가지 공정 모두 빗질의 성격을 띤다. 물론 빗살이 점점 더 촘촘해진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우스티드 옷감의 샤프함을 위해 필요한 길이에 미치지 못하는 짧은 섬유들을 걸러내고, 양모가 모두 같은 방향과 두께로 단정하게 빗어지게 된다. 이 Combing과정은 모든 양모 섬유가 한 방향으로, 일직선을 이루게 될 때까지, 섬유들이 모두 일정한 밀도를 보이게 될 때까지 반복된다. 이 Combing 과정을 통해 우스티드 울 섬유는 일렬로 정리된 채 일정한 두께를 이루게 되고, 그렇게 방직 준비를 마친 양모 섬유는 Silver라고 불린다.
이제 Sliver가 실로 거듭나게 되는 방직 작업의 차례다. Spinning이라고 불리는 방직 과정은 최소 35개의 양모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균일한 표면의 우스티드 원단을 만들어야 하는 우스티드 실은 방모사 실에 비해 훨씬 단단하게 꼬이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소모사 실은 매끈하고, 균일하며, 특유의 광택을 띠는 우스티드 원단을 구성하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dr6rrKXJitA
방모사 혹은 Woolen 옷감용 실은 우스티드 실과는 달리 Combing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Carding 과정을 통해 각각의 섬유는 분리된 상태이지만, Combing 을 거치지 않은 방모사용 울은 균일한 방향이 아닌, 비교적 짧은 길이의 섬유가 자유롭게 섞여 있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방모사 실은 무수히 많은 섬유들이 서로를 교차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Combing 과정이 생략된 방모사 양모는 우스티드와 같이 평행한 일직선이 아닌, 섬유들이 이리저리 삐져나오는 불균형한 질감을 가지는데, 이것이 플라넬/니트웨어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을 제공한다. 방직 과정에서도 방모사 실은 우스티드에 비해 느슨하게 꼬아지며, 따라서 우스티드 실보다 낮은 밀도를 가지게 된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실이 원단으로 짜이는 직조 과정을 필두로 양모의 여정을 계속해서 서술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