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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Jun 27. 2020

소모사/우스티드 수트 원단

원단 4

여전히 많은 남성들에게 있어서 우스티드 수트는 수트의 동의어와 다름없다. 샤프한 네이비/그레이 우스티드 수트가 판매 제품의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남성복 시장의 변함 없는 지루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스티드 수트가 겪고 있는 ‘이미지 문제’를 설명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스티드 수트가 연상시키는 흰 셔츠에 실크 타이를 맨 그레이/네이비 양복 차림 회사원의 모습은 매력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스티드는 12세기 잉글랜드 양모 직조 산업의 중심지였던 노포크 주의 마을 Worstead에서 기원한다. )


‘캐주얼화’ 일변도를 걷고 있는 오늘의 회사/오피스 문화는 계속해서 편한 차림을 강요하지만, 서울의 거리는 여전히 우스티드 수트-흰 셔츠 차림의 남성들로 가득하다. 물론 복식 문화는 변화하고 있고, 대형 로펌, 컨설턴트 펌, 은행에서조차 ‘비즈니스 캐주얼’(절대로 명료하게 규정될 수 없는) 차림이 허용된 미국, 영국의 직장 문화가 이미 ‘자유로운 복장’ 예찬에 휘둘리고 있는 우리나라를 강타한다면, (타이를 매고서는 입장할 수 없는 레스토랑까지 생겨난 외식 문화 역시 수입된다면) 회사원 차림의 고정관념 역시 변화를 맞이하게 될 테다.


수많은 해외 남성 블로거/스타일 작가들이 사뭇 장엄하게 선언하듯, 오늘날 수트를 입는 남성은 ‘수트를 입고 싶어 하는 남성’들 뿐이라면, 그들은 왜 굳이 수트를, 그것도 우스티드 수트를 아직도 고집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돼 마땅하다. 답은 간단하다. 깔끔하고 매끄러운 우스티드 수트가 여전히 격식을 대변하는 남성 수트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Anglo Italian의 Jake Grantham. 폭이 좁은 핀 스트라이프 더블브레스트 수트 차림이다. 주로 플라넬/트위드 차림으로 발견되지만, 우스티드 수트 역시 잘 어울린다


오늘은 수트 오더에 있어서 어떤 우스티드 원단을 골라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우스티드 수트를 구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제 선택은, 우스티드 원단의 색상, 무게, 패턴, 짜임 정도로 좁혀지게 된다. 가장 먼저 결정되어야 할 것은 원단의 무게다. (짜임에 대해선 지난 포스트에서 다룬 바 있고, 패턴에 대해선 추후의 포스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원단의 무게가 가장 먼저 결정돼야 하는 요소라는 사실은 구매하려는 수트가 어느 계절용의 수트인지의 여부가 가장 먼저 정해져야 함을 의미한다. 수트 원단에 대해 고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남성들을 위해 4계절용 원단이라 불리는 우스티드 수트 옷감들이 테일러 샵들마다 준비되어 있으나, 많은 경우, 이와 같은 원단은 환절기에 적합한 원단으로, 한국의 여름에는 너무 두꺼워 보이고, 한국의 겨울에는 너무 얇아 보이기 십상이다. (냉난방이 잘 되는 실내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실 수트의 보온성이 아니라 그것이 계절에 걸맞아 '보이는' 수트인가의 여부다. 지나치게 덥다면 어쩔 수 없이 재킷을 벗어야 하고, 춥다면 두꺼운 오버코트를 입어야 하기에.)


파리지앙 젠틀맨 휴고 자코멧은 최근 210-230그램의 원단은 여름용 원단,  250-280 원단은 3계절 (봄, 가을 , 겨울)용 원단, 300그램 이상의 원단은 겨울용 원단이라고 (매우 용감하게!) 원단 무게의 룰을 규정한 바 있다. 물론 그의 주장은 권위 있는 테일러/스타일 작가들의 그것과 명백하게 어긋나고 있다. 이는 남성복에 있어서 혼자만의 경험에 기대어 보편의 룰을 선언하는 일은 자칫 섣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사르토리아 피로찌의 수장 눈지오 피로찌. 라이트 그레이 싱글브레스트  체크 수트와 녹색 타이 차림이다.


비스포크 수트 구매를 가정했을 때, 물론 올바른 전략은 항상 "당신의 테일러를 믿으라"이다. 따라서 그/그녀에게 수트를 입게 될 계절, 수트의 용도(출근용인가 아니면 경조사용인가), 평소 선호하는 수트 원단의 무게를 알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경험이 풍부한 테일러는 당신의 선택지를 확연하게 좁혀줄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공유하자면, 자주 입게 될 출근용 우스티드 수트를 가정했을 때,  난 계절을 막론하고 가능하면 13oz 이상, 최소 11oz의 원단을 추천하고 싶다 (물론 봄-여름 용으로는 11-14oz의 프레스코 원단을 추천한다). (Permanent Style의 사이먼 크롬턴 역시 비슷한 의견을 피력한다. 테일러들 역시 일반적으로 무거운 원단을 선호한다)


미드-웨이트로 분류되는 11-14oz의 원단은 10oz 혹은 그보다 가벼운 원단이 구현할 수 없는 묵직함을 주고, 이것은 수트 재킷으로 만들어졌을 때 미드-웨이트 특유의 드레이프를 연출한다. 반대로 원단의 무게가 8oz 아래로 내려가면, 수트는 종잇장처럼 가벼워지고, 이와 같이 가벼운 수트는 그 내구성과 드레이프에 있어서 지나치게 연약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가벼운 원단의 내구성이 나쁜 것은 아니다. 평직 원단 중 다수는 가벼운 무게에서도 좋은 내구성을 보여준다. (사진은 8oz 리넨 수트) (출처: Permanent Style)


따라서 미드-웨이트 우스티드 수트는 그보다 가벼운 원단으로 만들어진 수트보다 더 긴 수명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높은 비스포크 수트의 가격을 감안했을 때, (특히 출근용으로 자주 입을 수트라면,) 원단 본연의 수명을 고려하는 일 역시 권장된다.


어느 정도 ‘무게가 있는’ 우스티드 원단을 선택하는 것은 테일러의 부담을 덜어주는 선택이기도 하다. 13oz 이상의 원단은 다리미를 이용하여 원단을 수축시키며 재킷/바지의 형태를 잡아가야 하는 테일러가 반길만한 선택이다. 지나치게 가벼운 원단은 다리미를 사용하기에 용이하지 않다. 물론 가장 클래식한 원단을 고르고자 한다면 30년대에 유행하던 18-20oz 원단까지도 고를 수 있을 테지만, 실용성과 실내 난방을 고려했을 때, 16oz 혹은 그 이상의 원단은 지나치게 두꺼워 보일 수 있다. (날씨가 매우 추워진다고 해도, 오버코트가 아닌, 실내에서도 착용하고 있어야 할 수트가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것은 더 이상 실용적이지 않다.) 13-14oz는 바지 앞 주름을 유지하기에도, 적당한 드레이프를 연출하기에도 좋은 무게이며, 재킷/바지의 형태를 직접 조정해야 하는 테일러를 위한 자비로운 선택이기도 하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Rope(1948)의 한 장면. 배우들의 수트들이 모두 멋져 보이지만 (지미 스튜어트는 항상 멋지다) 그대로 따라 입기에는 원단이 너무 두꺼워 보인다.



따라서 11-14oz는 지나치게 두껍지 않으면서도, 테일러의 다리미에 순응해 주는 ‘적당한’ 무게를 의미한다. (물론 11oz도 지나치게 덥다고 느끼는 열이 많은 이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이들은 이러한 특이 사항을 테일러에게 미리 알려주는 게 좋을 테다. )


또 한 가지, 많은 클래식 남성복 애호가들이 무게가 있는 원단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나치게 가벼운 원단보다 바지의 크리스(앞 주름)를 더 잘 유지하기 때문이다. 얇은 우스티드 원단으로 제작된 수트의 바지는 다리미로 잡은 선의 형태를 금세 잃어버리기 마련이고, 이는 매번 바지를 새로 다려야 하는 불편함을 야기한다. 많은 피가 쏠리는 상체보다 하체의 온도는 비교적 낮고, 따라서 두꺼운 소재의 바지를 입는 일이 불편함을 야기하는 일은 드물다(Permanent Style). 테일러 된 바지를 단품으로 구매하는 경우에 되도록 무게가 있는 원단을 추천하는 이유다.


310그램의 프레스코로 만든 여름용 바지를 입고 있는 브라이스랜드의 Ethan Newon 출처(Ethan Newton Instagram)


원단의 무게를 결정하는 것은 역시 실의 두께와 원단의 짜임, 즉 원단의 ‘밀도’다. 따라서 같은 소재를 가정했을 때, 트윌은 플레인 위브보다 더 높은 밀도를 보여주고, 따라서 더 무겁기 마련이다. (따라서 트윌과 같은 매우 밀도 높은 위브는 합색이나 플레인 위브보다 더 좋은 드레이프를 자랑한다. (Permanent Style)) 물론 하이 트위스트 원사를 사용한 플레인 위브 역시 좋은 내구성을 보여준다.




로로 피아나의 Tasmanian 번치. 슈퍼 150수의 원단들이다.




우스티드 원단의 선택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언급돼야 할 것은 바로 Super Number의 문제다. 클래식 남성복의 유행이 2000년대 각광받던 ‘비싼 원단’으로부터 멀어지면서, Superfine 원단, 슈퍼 150, 슈퍼 200수의 원단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테일러/스타일 작가/블로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고급스러움을 사랑하는 남성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슈퍼 150 이상의 원단이 주는 부드러운 촉감과 시간이 지나면서 스며 나오는 특유의 광택의 매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슈퍼 넘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단사마다 제각각의 기준이 존재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정의를 명시하자면, 슈퍼 넘버는 양모 섬유의 두께를 가리키는 치수이다. 슈퍼 넘버의 슈퍼는 이 양모 섬유의 두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슈퍼 시스템에서 기원한다. 높은 슈퍼 넘버는 매우 얇은 양모 섬유를 의미하고, 그것은 더욱 부드럽고 가벼운 원단의 재료가 된다.



   슈퍼 S 넘버                                        최대 양모 섬유 지름  (µ=마이크론 = 0.001mm)          


SUPER 80’s                                      19.75 µ

SUPER 90’s                                      19.25 µ

SUPER 100’s                                    18.75 µ

SUPER 110’s                                    18.25 µ

SUPER 120’s                                    17.75 µ

SUPER 130’s                                    17.25 µ

SUPER 140’s                                    16.75 µ

SUPER 150’s                                    16.25 µ

SUPER 160’s                                    15.75 µ

SUPER 170’s                                    15.25 µ

SUPER 180’s                                    14.75 µ

SUPER 190’s                                    14.25 µ

SUPER 200’s                                    13.75 µ

SUPER 210’s                                    13.25 µ

SUPER 220’s                                    12.75 µ

SUPER 230’s                                    12.25 µ

SUPER 240’s                                    11.75 µ

SUPER 250’s                                    11.25 µ



블루 블레이저- 그레이 팬츠 차림의 안토니오 파니코 (출처: Gentleman Chemistry)

나폴리 테일러링의 대부 안토니오 파니코(Antonio Panico)는


“졸부들은 높은 수의 원단을 좋아하지만, 테일러링을 이해하는 남성(connoisseur)은 클래식한 원단을 선택한다”


고 말한다. 이는 겉보기엔 멋지지만, 쉽게 구겨지고, 내구성이 떨어지는 높은 수의 원단 특유의 단점에 대한 지적일  테다. 하지만 180-200수 원단의 부드러움과 광택을 즐기는 졸부들 역시 매일 저녁 그 형태를 잃어버린 바지와 구겨진 재킷을 벗는 일을 반복하며,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금방 눈치채게 될 테다. (물론 마에스트로 파니코는 한 벌의 수트를 오랜 세월에 걸쳐 애용하는 신사적인 옷의 향유에 대해 무지한 존재를 ‘졸부’라고 호명했을 수도 있다)


자신이 구상하는 수트에 알맞은 무게, 적당한 패턴, 그에 맞는 디테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훌륭한 테일러를 둔 비스포크 하우스를 방문한다면, 그들이 구비해둔 이탈리아/영국의 대표 원단사들의 제품 중 알맞은 원단을 선택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테다. 끊임없이 테일러의 조언을 구하라. 언제나 올바른 전략은 자신의 테일러를 신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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