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단 5
플라넬 수트는 한국 남성들에게 인기 있는 상품이 아니다.
아마 그 이유는 한국에서 남성용 니트웨어가 쉽사리 인기를 끌지 못하는 까닭과 동일하지 않을까. 출근용 우스티드 수트, 일상용 티셔츠-청바지, 스포츠용 기어-운동화 외 또 다른 장르의 옷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는 대다수의 남성들에게 있어서 일상복보다는 단정하고, 우스티드 수트보다는 캐주얼한 플라넬 재킷, 플라넬 팬츠, 니트웨어, 치노 팬츠, 처카/첼시 부츠는, 그것이 유명 브랜드의 기호를 입지 않는 이상, 굳이 돈을 투자해서 구매할 가치를 느끼기 어려운 ‘너무 먼’ 옷이 되기 쉽다.
(플라넬은 16세기, 양모 원단 양면에 보풀 처리를 한 옷으로 추운 겨울을 견뎠던 웨일스인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다만 플라넬의 어원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국어로 플란넬이 올바른 철자라고 하지만, '플란넬'의 어감은 어딘지 우스꽝스럽다. )
‘어쩔 수 없이’, 혹은 '특별한 날' 입게 되는 수트와, 일상생활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옷가지,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스마트한 비즈니스 캐주얼 워드로브'를 갖추는 일은 매우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소수의 남성복 애호가들을 제외하고선 대다수의 남성이 옷에 대해 무관심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플라넬 수트가 겪고 있는 멸시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테다.
(물론 이러한 남성들의 무관심은 일본, 이탈리아, 스웨덴 등 몇몇 곳을 제외한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의 실상이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서양의 보통 남성들이 니트웨어와 올바른 청바지 핏에 조금 더 익숙하다는 것일까)
그러나 플라넬 수트는 클래식 남성복의 규율을 지키면서도, 지나치게 격식을 차린 옷차림으로 타인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은 21세기 남성복 애호가들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다. 잘 만들어진 수트가 우스티드 원단의 차가움이 아닌 플라넬 특유의 부드러움과 섞일 때, 수트는 본연의 격식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한 결 더 편안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캐주얼해진 드레스코드 덕에 우스티드 수트의 포멀함이 부담스러운 남성들에게 테일러들이 곧잘 플라넬 수트를 추천하는 이유다.
플라넬 수트 구매를 결정했다면, 역시 이번에도 무게, 색상, 조직, 패턴의 선택이 뒤따라야 한다.
지루한 일반론을 반복하는 일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플라넬 원단 선택에 있어서도 우스티드 수트용 옷감의 선택과 동일한 전략을 권유하고 싶다. 실용성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무거운 원단을 선택하라.
사실 ’안전한 선택'의 중요성은 우스티드 원단 보다는 플라넬의 선택에 있어서 더욱 강조돼야 할 테다. 플라넬은 짧은 양모 섬유의 특성상 우스티드에 비해 낮은 밀도를 가지고, 가벼운 무게의 플라넬 원단은 열과 마찰에 지나치게 취약하기 쉽다. 11oz 이하의 플라넬이 바지 주름(Crease) 형태를 금새 잃어버리는 이유이다. 또한 가벼운 플라넬 원단으로 만들어진 수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부분적으로 그 힘을 잃고 쳐지기 시작할 수 있다(bagging). 이와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매주 바지를 다시 다려야 하는 수고를 면하기 위해선 일반적으로 13oz 이상의 플라넬을 선택하는 것이 요구된다. (플라넬 애호가들이 13oz 이상 혹은 15oz 이상의 플라넬만이 진정한 플라넬이라 주장하는 이유다(Permanent Style))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벼우면서도 좋은 내구성을 보여주는 플라넬 원단들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안전한 선택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장 높은 무게의 원단을 고르는 것이다. 당신의 테일러가 고마워할 것이며, 옷의 수명을 늘리는 데에도 일조할 것이다. 플라넬과 우스티드 수트 사이 활용성의 차이가 있다면 플라넬은 엄연한 가을-겨울용 원단이라는 사실이다. 라이트-웨이트 플라넬 역시 엄연히 플라넬이기에 그것을 봄-여름에 입을 수는 없다.
(스타일 작가 브루스 보이어는 비딸레 바베리스 까노니코의 라이트-웨이트 플라넬의 독특한 부드러움, 아름다운 색감, 좋은 내구성을 높게 평한 바 있다. 안타깝게도 까노니코의 플라넬로 만들어진 옷을 입어본 경험이 없는 난 그의 말을 검증할 수 없었다)
플라넬 수트의 표준은 역시 그레이 플라넬이다. 1950년대에 남성복식의 클래식 아이템으로 부상한 그레이 플라넬 수트는 버튼다운 옥스퍼드 셔츠, 니트웨어와 같은 캐주얼한 착장과도, 포멀한 핀 칼라/스프레드 칼라+ 실크 타이+ 커프 링크와도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네이비 플라넬 수트 역시 그에 못지 않은 범용성을 보여주지만, 클래식 그레이 플라넬이 클래식 남성복 세계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은 여전히 특별하다.
<<드레싱 더 맨>>의 저자 알란 플루서는 그레이 플라넬 수트야말로 플라넬의 ‘낡은 것처럼 보이는’ 기모감을 사랑하는 올드-머니 취향에 가장 충실히 부합해 주는 수트임을 주장한다. (그것은 낡은 옷을 선호하던 아이비리그 스타일의 미학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어떤 남성 용품과도 훌륭한 조화를 보여주는 그레이 플라넬은 클래식 남성복의 ‘흰 백지’(blank canvas)와도 같은 것이다.
우스티드의 샤프함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플라넬의 기모감을 향유하고 싶은 남성들을 위해서 오늘날 영국과 이탈리아의 대표적 원단사들은 우스티드-플라넬이라는, 우스티드 식으로 짜였지만, 플라넬의 밀링 과정을 거친, 우스티드와 같은 탄탄한 밀도를 보여주지만, 플라넬의 부드러운 촉감을 보여주는 원단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플라넬 본연의 기모감과 우스티드 본연의 샤프함을 좋아하는 나에게 우스티드-플라넬은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우스티드 수트 일색인 포멀한 오피스의 분위기가 플라넬 수트 차림으로 출근하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점을 고민하는 남성에게 우스티드-플라넬은 고려할만한 선택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원단 선택에 대한 한 가지 조언을 더 전언하자면, 안전한 선택을 위해선 평균적으로 조금 더 높은 밀도를 보여주는 영국 원단을 선택하라는 것이다(Permanent Style). (물론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의 비탈레 바베리스 까노니코의 플라넬을 시험해 보는 일 역시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폭스 브라더스 사의 디렉터 더글라스 코도(Dougals Cordeaux)는 플라넬 원단에 함유된 양모 섬유 색상 배합의 차이가 영국산 플라넬에 갈색 빛이, 이탈리아산 플라넬에 푸른색 빛이 도는 이유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영국 플라넬이 연상시키는 점잖은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폭스가 아니라면 플라넬이 아니라는 오만한 모토를 앞세운 ("If It's not Fox, It's not Flannel") 플라넬의 원조 폭스 플라넬의 14oz/370-400gr 클래식 그레이 플라넬을 선택하는 일에 후회는 없을 테다. 그레이 플라넬 수트를 구매하는 일은, 클래식 남성복의 청바지와도 같은 그레이 플라넬 팬츠를 '덤으로'(?) 얻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가장 먼저 테일러의 의견을 구하라. 그레이 플라넬 수트가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해줄 테일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