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단 6
“수트는 위아래가 같다. 색이나 소재 모두 동일하다. 재킷은 대담한 무늬, 대담한 색채, 대담한 소재가 허용된다. 수트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재킷은 코디네이트에 무한한 자유가 있다. 그러나 수트는 이러한 자유가 한정된다. 반면에 재킷은 입는 즐거움이 우선이다. 수트는 입는 즐거움보다 어디에 입고 가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오치아이 마사카츠)
옷이 제공할 수 있는 즐거움을 최대한 만끽하고자 하는 남성에게 재킷은 분명 수트보다 매력적인 선택지다.
물론 재킷 착장에도 룰이 존재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클래식 남성복에 입문한 남성들이 가장 많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야가 재킷 착장이다. 오치아이 마사카츠가 주장하듯, "코디네이트에 무한한 자유"를 허락하는 재킷 착장이 이처럼 많은 어려움을 야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크루플즈 2>> 하권에는 흥미 있는 대목이 한 군데 눈에 띈다....“불이 났다고 가정하고, 옷장 안에서 이것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옷을, 정확히 5분 안에 골라 쇼핑백에 넣어 와요”
꽤 재미있는 발상이다... 나는 그 다음 내용을 읽지 않고 내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추운 때이므로 감색 캐시미어 재킷과 플라넬 바지를 모두 쓸어 담는다. 면 소재의 푸른 계열 셔츠에 무지 캐시미어 타이. 타이 색은 감색이나 짙은 초록색이다. 구두는 갈색 플레인 캡토에 검은색 양말, 속옷 한 벌. 라운드넥 검정 스웨터와 치노팬츠. 로퍼도 넣을 것 같다. ... 수트를 넣지 않은 이유는 다른 옷과 바꿔 가며 맞춰 입기가 어렵기 때문이다...감색 재킷이라며, 불이 나서 대피한 후에 셔츠나 넥타이를 사서 변화를 줄 수 있다. 수트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여름에 그랬다면 감색 리넨 재킷에 회색 우스티드 바지. 새하얀 리넨 셔츠와 실크 소재의 감색 무지 타이. 로퍼와 양말. 면바지에 폴로셔츠. 속옷 한 벌이다. (오치아이 마사카츠)
우리는 불이 난 집에서 그가 부리나케 들고 나온 감색 재킷들의 소재가 양모가 아닌, 캐시미어(겨울용)와 리넨(여름용)이라는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경험이 많지 않은 남성의 경우, 재킷 착장에 있어 그가 겪는 어려움은 재킷이 요구하는 원단의 질감에 대한 무지에서 기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킷을 입는 일이 어렵다면, '입는 즐거움'을 즐기기에 앞서 수트용 원단과 재킷용 원단 사이의 차이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공부가 필요할 수 있다.
비즈니스맨의 유니폼과도 같은 우스티드 그레이 수트, 특히 픽 앤 픽, 버즈 아이, 트윌 서지와 같은 샤프한 원단으로 제작된 수트 상의를 그저 ‘재킷’으로 걸치고 플라넬 바지나 코튼 바지를 매치시키는 일을 상상해보자. 아무래도 어색하다. 샤프한 우스티드 그레이 원단은 재킷용으로는 지나치게 격식 있는 원단이다.
반면, 큰 헤링본이 눈에 띄게 도드라진 캐시미어, 직조감이 성글성글한 리넨-실크 혼방, 갖가지 색의 실이 얽히고설켜있는 묵직한 트위드로 만들어진 쓰리
피스 수트를 입은 남성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그 역시 매력적으로 보이기는 쉽지 않을 테다. (캐시미어와 가벼운 리넨-실크 소재가 바지감으로는 지나치게 연약해 보인다는 점도 한 몫한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재킷에 어울리는 원단은 수트의 소재보다 밀도가 떨어지고, 불규칙적인 위브를 보여주며, 샤프함 보다는 거친 촉감을 보여주는 경우가 보통이다. 캐시미어처럼 매우 짧은 섬유로 이루어진 재킷감의 촉감을 우스티드 원단의 매끈한 그것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재킷감들이 훨씬 더 느슨하고 불규칙한 조직감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재킷감의 특징은 재킷 차림이 상징하는 ‘캐주얼함’을 반영한다.
원단의 밀도가 낮고, 그 직조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원단은 재킷용이고, 밀도가 높고, 촉감이 매끈하며, 직조의 정렬이 깔끔한 원단은 수트용이라는 규정의 경계에 위치하는 원단들 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같은 캐시미어-울 혼방 혹은 실크-울-리넨 혼방이라도 수트에 어울리는 원단이 있고, 재킷에 어울리는 원단이 있으며, 어느 쪽에도 무난한 원단이 있다. 이러한 경우 결국 경험에 따른 ‘직관’이 발휘돼야 하고, 역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테일러의 조언을 구하는 일이다. (지난 포스트에서 다룬 그레이 플라넬 역시 밀도가 높은 무지 원단인 경우 수트에 더 어울리고, 헤링본과 같은 직조감이 도드라진 플라넬이라면 재킷용으로 활용돼도 무방하다.)
강한 마찰과 압력을 견뎌야 하는 바지의 원단으로서의 실용성 역시 갖춰야 하는 수트용 원단과는 달리, ‘단품’ 재킷용 원단은 그 무게, 색상, 패턴에 있어서 많은 제한을 받지 않는다. 수트감으로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가벼운 원단이 재킷감으로선 이상적인 경우는 손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캐시미어 수트, 리넨 수트, 코튼 수트, 트위드 수트, 화려한 패턴의 수트 모두 올바른 선택일 수 있다. 결국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테일러의 조언을 구하라.)
다만 재킷용 원단과 수트용 원단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룰에도 예외는 있다. 바로 네이비 블레이저가 그것이다. 1837년부터 영국 해군의 유니폼으로 자리 잡은 푸른 상의와 흰색 하의의 조합은 19세기 말에 시작된 대학생들의 블레이저 전통으로 이어졌고 (블레이저의 원조인 케임브리지 조정팀 학생들의 블레이저는 붉은색이었다고 한다), 이는 1920년대에 이르러 영국 복식문화를 모방하는 일에 열심이던 미국의 아이비리그 학생들에 의해서 ‘블레이저 착장’의 장르를 개척하게 된다.
“옷장 문을 실제로 열었다면 그렇게 금세 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옷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최근엔 이것저것 거치적거리는 옷이 많아졌다. 몸은 하나인데 하고 한숨을 쉴 때도 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감색 재킷만은 몇 벌이 있든 거치적거리지 않았다. 나는 감색 재킷 모두를 번갈아 골고루 입고 있다. 거치적거리지 않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옷이란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 생각한다.”(오치아이 마사카츠)
싱글브레스트, 혹은 더블브레스트로 제작되는 클래식 블루 블레이저는 네이비 블루 색상 원단에 금장 버튼이 달린 것이 특징이다. (금장 버튼 외에 특별한 디테일은 요구되지 않는다. 그저 네이비 색의 재킷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레이 플라넬, 화이트 플라넬, 면 치노 등과 좋은 조화를 보여주는 클래식 네이비 블레이저는 다른 재킷들과 달리 수트용으로 적합한 우스티드 원단으로도, 또는 재킷용으로 적합한 캐시미어, 실크, 리넨 등의 소재로도 제작될 수 있다. 물론 샤프한 원단으로 만들어진 블레이저는 보통의 ‘재킷감’으로 제작된 다른 스포츠 재킷들보다 약간 더 포멀한 인상을 준다. 블레이저 착장에는 셔츠와 타이만이 허용된다는 영국식 착장의 룰이 존재하지만, 오늘날의 블레이저는 오랜 전통이 샤프한 원단의 네이비 재킷을 우리 눈에 어색해 보이지 않게 해 줄 뿐, 사실상 네이비 색의 giacca일 뿐이다. 골드 버튼 역시 뿔 버튼 또는 가죽 버튼으로 대체돼도 무관하다.
언급한 바처럼 개략의 규정이 있을 뿐, 명확한 경계를 지을 수 없는 것이 재킷감-수트감 원단의 차이고, 그 경계선을 감안하며 원하는 재킷의 범용성을 고민하는 일 역시 비스포크 테일러링이 제공하는 재미 중 하나다.
다만 수트감과 재킷감의 차이가 강조돼야 하는 이유는 재킷 착장에 있어서 가장 먼저 피해야 할 것이 수트 상의를 걸친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등장한 ‘재킷’의 형태는 수트의 상의와 확연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노포크 자켓 역시 ‘재킷’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클라크 게이블이 즐겨 입었건 액션-백 재킷, 혹은, Yoke가 달린 재킷들은 영국 상류층의 ‘컨트리 착장’의 전통을 반영하는 동시에, 포멀한 수트 차림과 캐주얼한 재킷 차림의 경계선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트 상의와 기본적 구조가 동일한 오늘날의 재킷은 올바른 원단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세부적 디테일의 차이를 통해 재킷으로 하여금 수트 상의처럼 보이는 일을 피하게 하는 테크닉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효과는 한정적일 수 있다.
이탈리아의 많은 사르토리아들은 재킷과 수트에 각각 다른 디테일을 가미하여, 재킷이 ‘재킷’임을 표시한다. 사실상 재킷용으로 보기에 조금 ‘애매한’ 원단들로 만들어진 재킷에 이와 같은 디테일들을 가미하는 것 역시 재킷이 수트 상의와 혼동되는 일을 막아준다.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버튼 선택이 주는 효과의 활용이다. 금장 버튼, 원단의 색상과 크게 대조되는 뿔 버튼, 진주 버튼(여름 재킷용) 또는 가죽 버튼이 연출하는 ‘캐주얼함’은 재킷이 수트의 상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수 있다.
재킷에만 추가되는 디테일은 아니지만, 플랩 포켓, 제트 포켓이 아닌 패치 포켓을 힙 포켓 또는 가슴 포켓으로 선택하는 일 역시 재킷을 한층 캐주얼해 보이게 만들어줄 수 있다.
조금 더 미세한 디테일 중 하나는 재킷 라펠을 포함한 솔개들에 들어가는 아웃 스티치다. 이 역시 재킷의 캐주얼함을 표시하는 방식 중의 하나다.
19세기 당시 몸의 실루엣을 완벽하게 잡아주던 관능적인 형상의 비스포크 프록코트와-담황색의 사슴 가죽 바지 차림을 즐기던 귀족들이 중간 계급의 유니폼으로서 처음 등장한 상하의 원단이 동일한 라운지 수트를 Ditto라는 멸시 섞인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상기시켜본다면, (브루멜 역시 다크 네이비 프록코트에 오프-화이트 바지를 그의 유니폼으로 삼았다) 라운지 수트의 '심심함'에 대한 댄디들의 반감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년 전 오치아이 마사카츠는 일본인들이 조금 더 재킷을 입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때와 비교했을 때 오늘날 일본의 복식문화의 수준은 놀라 보게 달라졌다. 우리의 사정은 그에 비해선 한참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지난 10년간 불어닥친 클래식 남성복의 유행은 또 하나의 유행이었을 뿐, 복식에 대한 우리의 의식 수준을 개선시켜주진 못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