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능의 욕망 Aug 18. 2020

새빌로의 Good Old Days

새빌로의 탄생 14


지난 포스트에 이어 Thomas Girtin의 Makers of Distinction의 <God Creates and the Tailor Shapes> 챕터의 내용을 이어가려 한다.


손쉬운 이해를 위해 직역보다는 의역의 접근을 택했지만,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60년대 새빌로를 다룬 지난 글과 달리 이번 내용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새빌로의 '좋았던 시절'과 이와 같은 시절의 종말을 가져온 사회적 변화에 대한 고찰이 그 주를 이룬다.


중세의 유산인 테일러링의 공예에 평생을 바친 사르토/테일러들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유령'에 시달리는 존재들이다. 이탈리아의 사르토들을 자주 접하는 남성복 애호가들은 그들 역시 "예전이 좋았지/옛 테일러들은 정말 대단했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테다. 월남전과 함께 도래한 히피 운동, 롤링 스톤스, 비틀스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의 공습,  패션 브랜드들의 급부상이 가져온 의류 산업의 변화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1960년대 새빌로는 2020년 새빌로의 관점에선 '순수했던/좋았던 시절'일지 모르나, 당시 새빌로의 장인들 중 상당수는 그들의 ‘오늘'을 향해 조금은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며, 사라져 가고 있던 '진짜' 고객들과, '진짜' 장인들'에 대한 향수에 잠겨있던 보수적인 남성들이었다.


'좋았던 시절'의 전설적인 테일러들의 옷을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테일러들의 "옛날이 좋았지"의 푸념은 도리 없는 안타까움을 유발할 뿐이다. 가끔씩 발견되는 빈티지 수트들에 대한 리뷰들로 궁금증을 달래야 하는 클래식 테일러링을 사랑하는 남성들의 마음은 모두 비슷하리라 짐작한다 (Jeffrey Diduch의 Made by Hand와 Hand Sewan Canvas가 대표적이다) 빈티지 헌츠맨 수트를 손에 넣는 일이 요원한 나로선 '좋았던 시절'의 테일러링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번역하는 일이 옷을 사랑하는 남성들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일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CaiP2tK6MeI

Gianluca Migliarotti의 O'mast에 비해 영상미는 많이 떨어지지만, 남성복 애호가라면 필히 시청해야 할 영화 <<Men of the Cloth>>다.


Makers of Distinction(1960)

Thomas Girtin



God makes and the Tailor Shapes 2/2



“먹고살려면 열심히 일해야 했지. 하지만 그때는 좀 더 여유 있게 일하던 시절이었어. 지금은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가(skiffle work)- 서두르고, 서두르고, 서둘러야 해. 예전엔 그저 물 흐르듯 일했는데 말이지.”


맥컬록 씨(새빌로 시니어 테일러)는 회상한다.


오늘(1960)의 새빌로에서 ‘여유’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이 전통 공예에도 현대적 기술들이 도입된 것이다. 다리를 꼬고 앉은 테일러의 등을 특별 제작된 의자가 받쳐주고, 몇몇 공방에는 능률화된 분업 방식이 침투하기까지 했다. 각각의 장인이 하나의 수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하기보다는 한 명의 장인이 수트의 한 부분을 담당하여 그 부분만을 제작하는 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이러한 분업이 생산의 효율성을 향상시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루 종일 주머니를 다는 일에 열중하는 테일러는, 머지않아 하나의 수트를 전부 제작하는 숙련된 장인보다 주머니를 다는 일에 더 능숙해질 수밖에는 없다. 이러한 시스템은 또한 모든 손님들이 ‘최고’ 장인의 손길을 ‘부분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을 가진다.



앤더슨 앤 쉐퍼드(Anderson & Sheppard)의 커팅 룸, 재단사들은 언제나 수트를 착용해야 한다.



그러나 단점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옷에는 뚜렷하게 정의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빠져 있다. 규정될 수 없는 - 이번 옷에 발휘된 솜씨가 다음 옷에 완벽하게 똑같이 반복해서 발휘될 수 없다는 인간 본연의 불가능에서 기원하는 -  감성적인 무언가가 분업화 방식으로 제작된 옷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저명한 테일러들은 ‘분업화’의 개념을 그저 학구적인 개념으로만 인지할 뿐,  그것의 도입이 필요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게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업계 내 전반적인 속도 증가의 현상은 이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젊은 남성들에게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들이 거쳐야 하는 도제 기간 - 숙련된 장인 옆에서 일을 배우는 기간-은 예외 없이 5년이었다. 동시에 이러한 도제를 훈련시키는 일로 장인이 감수해야 하는 시간과 급여의 손해는 고용주에 의해 보상돼야 했다. 그러나 오늘 업계에 수혈되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선배들보다 훨씬 더 기민하다. 그들은 그 절반의 시간 안에 훈련 과정을 마쳐버린다.


과거에는 새로이 업계에 입문하는 이들은 장인으로서 오랜 전통을 가진 가문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대대로 같은 가게에서 일하는 가문들 역시 흔했다. 맥컬록 씨의 아버지 역시 장인이었고, 그의 형제, 누이, 그의 어머니 역시 결혼 전에는 테일러링 업계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긴 전통을 가진 가문들의 장인들 중 다수는 영리했지만 문맹이었고, 주로 영리하지만 문맹인 여성들과 결혼했다. 이와 같은 부부들은 영리하면서 읽고 쓸 줄 아는 자녀들을 낳았고, 그들은... 부모의 직업보다 더 좋아 보이고 – 실제로도 당시에는 더 좋았던- 공무원과 같은 직업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 마스터 테일러의 관점에서는 – 장인으로서의 일이 공무원의 그것보다 더 나아지고, 사무직보다 급여도 훨씬 높아지면서, 많은 장인들이 그들의 가업에 등을 돌린 것을 후회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 유행의 반동을 경험하고 있다. 많은 수의 아버지들이 아들들을 도제로서 업계에 투입시키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우리로 하여금 가까운 미래에 테일러링 업계가 더 이상 장인의 부족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낳는다...


숙련된 장인-테일러들은 도제의 문제에 관해서 매우 고매하고, 헌신적인 자세를 취한다. 만약 그들이 훈련시킨 한 젊은이가 다른 하우스에 취직돼 그곳에서 근무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업계에 새로이 장인이 한 명 추가됐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실제로 테일러링 업계는 몇 차례씩이나 인력 부족에 의해 존속의 위기를 겪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앤더슨 앤 쉐퍼드 공방의 장인과 도제- 공방은 지하에 위치한다 - 재단사들의 비해 이들의 복장은 한결 캐주얼하다.

  

킹 윌슨 씨 (마스터 테일러)는 1948년

우리는 우리의 공예가 멸종될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술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공예들이 하나둘씩 산업가, 정치가, 과학자의 기요틴에 의해 하나둘씩 파괴되고 난 후, 마지막으로 소멸될 것입니다. [테일러링이] 살아남을 수 있겠냐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업계를 다시 재활성화시키고, 새로운 장인들을 조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인재의 탐색에 있어서, 우리의 자녀들보다 더 좋은 유망주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업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니까요. 그들에게는 흥미롭고, 과도한 노동을 강요받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커리어로 향하는 문이 열려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사회 구조의 변화, 그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루 리듬의 변화, 이와 같은 변화는 패션 스타일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왔다. 윌렛 커닝턴 박사가 말하길,


“세계 1차 대전이 유행의 흐름을 결정해버리기 전, 우리 사회는 약 30년간, ‘우아함’과 ‘유동성’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매우 엄격한 사회적 에티켓이 우아한 불편함을 사회에 강요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선 여러 가지 스포츠에서부터 시작된 [캐주얼화] 움직임이 복식문화를 - 이것에 반대하는 이들이 ‘추접스럽다’고 묘사하는-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


그는 덧붙여서,


‘의복은 가장 보수적인 예술이다. 따라서 변화를 싫어한다. 그것은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하는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고, [사회/문화의] 사건들의 압박에 의해서만 발전을 강요받는다.’


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 1차 대전이 가져온 변화가] 더 자유로운 사회를 확립하게 된 이후, 남성복/테일러링에 있어서 스타일의 변화는 차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 속도가 늦춰지게 된 것이었다.


밀라노의 A.Caraceni 사르토리아의 고객으로 알려진 아보카토이지만, 그는 헌츠맨의 전설적 재단사였던 Colin Hammick의 중요한 고객이기도 했다.



 Pearl Binder양(Trimmer)이 말하길,

‘오늘날 영국 신사는 의복에 있어서 아주 미세한 차이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만약 그(와 그의 테일러)의 노력의 결과가 너무 미묘한 나머지 일반인들이 그것을 알아챌 수 없다면, 그것은 대중이 감당해야 할 불운일 뿐이었다. 마치 임금님의 새 옷처럼, 그의 수트의 미묘한 멋은 새빌로 수트를 입는 다른 남성들의 심미안에 의해서만 감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테일러들은 이러한 미세한 차이를 놓칠 이들이 아니었다. 모든 마스터-테일러들은 그들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오늘의 트렌드’에 대한 그만의 해석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전문가의 눈’은 지나가는 행인이 걸친 수트가 어느 하우스의 것인지 뿐만 아니라 수트를 재단한 재단사의 이름까지도 알아보고 있었다. 의복의 미세함이란 이처럼 더없이 섬세한 영역의 문제인 것이다.


각각의 테일러는 그만의 취향을 가지고 있지만, 스타일 그 자체는 업계 전체를 아우르는 여론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다. 테일러는 사실상 무언가를 발명하는 이라기보다는 아이디어의 '집합-처리소'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존재다. 테일러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새로운 유행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른 곳에서 듣고 오게 되기 마련이었고, 그들은 이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른 친구들과 함께 테일러 하우스에서 나누었으며, 다른 테일러 하우스에서 다른 옷들을 주문하기도 했다.


[테일러들은] 다섯 가지 유형의 손님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로는] 그가 항상 주문하던 똑같은 수트만을 원하는 융통성 없는 보수적인 손님이 있다. 이와 같은 손님은 스타일의 유행이 지났거나, 혹은 아예 전시대의 것이라는 사실 따위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영국의 변방 지역에는 에드워디안 (에드워드 7세 시절의 – 타이트한 핏으로 유명한 스타일의 수트) 스타일의 니커스 수트를 입고 거니는 일을 즐기는 나이 든 신사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먼 옛날 그들의 마음을 처음으로 사로잡았던 모양과 똑같은 수트를 때때로 한 벌씩 주문할 뿐이다.


앤더슨 앤 쉐퍼드는 찰스 황태자의 테일러라는 사실을 즐겨 선전하지만 로열 워렌트(위임장)는 앤더슨 앤 쉐퍼드가 아닌, 앤더슨의 재단사였던 존 히치콕에게 부여된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의 손님은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고 싶어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유행하는 트렌드보다 아주 조금 앞서가고 싶을 뿐인 남성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유행을 따르고 싶어 하지만, 다른 모든 이들이 그 새로운 스타일을 입고 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에서야 그것을 주문하고자 하는 세 번째 유형의 손님과 구분된다.


네 번째로는 물론 트렌드의 변화에 대해서 거의 눈치채지 못하는 남성이다. 그는 자신이 항상 입던 스타일의 옷을 여전히 변함없이 입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유행이 가는 길을 자신도 모르게 무난하게 따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스펙트럼의 극단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들과는 달라 보이는 것을 고집하는 손님이 있다. 그는 유행을 주도하거나 유행을 탄생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남성이다. 그는 오히려 그가 고안한 스타일이 유행하게 되는 순간, 그것에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린다.




그의 테일러 John HItchcock의 아들 Steven Hitchcock이 2001년에 그를 위해 제작한 비큐나 코트를 2019년에도 변함없이 애용하고 있는 찰스 황태자


극단적인 스타일은 그것을 남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대량생산-사업가의 손에 의해 망가져 버리기 마련이다. 이들은 이와 같은 스타일을 포착하여, 과장한 후, 처음 그 스타일을 고안한 이가 의도했던 것과는 완벽하게 다른 상품이 탄생할 때까지 외국의 양식과 섞어버린다. 다른 업계와 마찬가지로 그레셤의 법칙은 테일러링 업계에서도 유효한 것이다. 드레이프가 가미된 코트/재킷은 줏수트로 변모해 버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의복 위원회가 고안했다고 전해지는 에드워드식 수트는 테디 보이들을 상대로 옷을 판매하는 이들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됐고, 이 사건이 가져온 충격은 경악한 새빌로 테일러들로 하여금 그 어떤 새로운 시도도 하지 않도록 하는 참사를 가져오게 됐다.



여유 있는 드레이프 수트가 과장에 과장을 거듭하여 결국 미국에서 유행한 Zoot Suit로 변모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소심한 변화와 수정만을 제안할 뿐이죠”라고 Binder양은 말한다.  테디 보이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고 에스프레소 또는 밀크 바를 더 선호하기에, [그들에 의해 모방되기 어려운] 새로운 시도는 (테디 보이들이 좋아하지 않을만한) 속물스런 매력을 뽐내는 칵테일파티용 ‘sundown jacket’ 등과 같은 것으로 한정돼야 했다. 신사들을 위한 ‘망토’를 다시 소개하는 유행 역시 시도됐지만, 조용히 사라졌다. 그것은 표절되기에, 그것도 값싸게 표절되기에 너무도 쉬운 시도였다.



[이러한 유행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의복 디자인에 과감한 변화를 가져오는 유행을 주도하는 남성들은 존재했다. 그들은 테일러에게 굉장히 색다른 스타일을 주문했고, 그것은 그들이 입었을 때 멋져 보였다. 만약 테일러를 찾은 다음 손님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을 찾는다고 고백할 경우, 그의 테일러는 이 새로운 스타일을 그에게 권유하게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우 테일러는 이러한 스타일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에게까지 전파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워털루에서 오른팔을 잃은 후,  라글란 소매로 만든 코트를 고안하여 즐겨 입었던 라글란 남작

이와 같은 혁신을 가져오는 남성들 중에서도 몇몇 이름은 [새빌로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알버트 시계 체인을 유행시킨 섭정 왕자 (조지 4세), 홈버그 모자, 낮은 이브닝 웨이스트 코트 등 스스로 고안한 수많은 스타일을 유명하게 만든 에드워드 7세, Lord Petersham과 그의 오버코트, Lord Raglan과 그의 [라글란] 소매, 광을 낸 실크 모자를 고안했다고 전해지는 Lord 하드위크, 잉글랜드에 디너-재킷을 처음 소개했다고 전해지는 Lord Dupplin, 알프레드 드 로스차일드 남작, Lord 체스터필드, 월터 길비 경, Brabazon 장군 (Bwab) - 숙련된 장인들은 이들을 위해 새로운 스타일의 의복을 탄생시켜주었고, [혈통에 힘입어 특권층에 속해 있던] 이들은 장인들이 활약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과감한 패턴을 즐겼으나, 한 번 주문한 수트를 몇십 년씩 애용했던 윈저 공작

 

남성복의 저명한 혁신가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다른 모든 공예와 마찬가지로 테일러 하우스에서도 손님들은 변화하고 있다. 세계 1차 대전은 한 세대의 손님들을 완벽히 전멸시켰고, 이는 아버지의 테일러를 아들이 물려받는 상속의 혈통을 갑작스레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공예 업계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손님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


거대 영주들은 나이트클럽 사장들로, 귀족들은 관료들로, 제국의 지배자들은 고철과 전쟁 물자의 지배자들로 교체됐다. 이러한 변화는 나이 든 테일러들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것이 아니었으나, 많은 저명한 테일러들은 이러한 변화를 다른 ‘진화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가 만드는 수트를 구입하는 손님 외에 또 다른 ‘올바른 유형’의 손님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업주의에 빠진 냉소적 고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친 다이아몬드 원석 역시 우아함을 경험함으로써, 혹은 그것에 빠져버림으로써 비교적 덜 거칠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기원하고 있었다. 또한 테일러들은 새로운 손님들의 수혈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관습 속에서 도태될 수 있었던 그들을 깨워주는 일에 일조했다고 고백한다.


20세기 초까지  그들이 '천박하다'는 이유로 할리우드 스타들을 손님으로 받아주지 않는 테일러 하우스들이 새빌로에 존재했다.



그러나 사실 고객층의 교체가 가져온 변화는 매우 컸다. 그것은 봉건주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장인과 고객 사이의 관계를 완벽하게 탈바꿈시켜 버렸다. 과거 테일러는 그의 고객의 신뢰와 지속적인 주문에 완벽하게 의존해야 했다. 남자 하인들을 포함한 두 가족의 주문 만으로도 그들은 괜찮은 사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한 가족의 의복을 도맡는 일만으로도 작은 하우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수트가 한 벌에 5 기니(guinea)밖에 하지 않았으나 - 물론 당시의 이득 마진은 오늘날의 60파운드의 그것보다 높은 편이었다- 가족 구성원의 모두가 각종 행사를 위해 항상 수트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남자 하인들 – 이들의 숫자는 스무 명에 달할 수도 있었다 – 역시 항상 새로운 의복을 필요로 했다. 결혼식과 장례식은 언제나 추가적인 의복을 의미했고, 이는 하우스에게 추가적인 수익을 제공했다. 그러나 [테일러-손님의] 이러한 관계는 테일러가 부분적으로 고객에게 은혜를 입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가족 중 한 명에게 모욕을 주는 일은 성공적인 사업을 완벽하게 망가뜨리는 길이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고객들은 그들의 대금을 납부하는 일에 있어서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의 테일러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오랜 속담에는 적지 않은 진실이 포함돼 있었다.



영국의 대표적 로열 댄디, 국왕 에드워드 7세와 그의 사촌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 두 남성 모두 헨리 풀의 고객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고객이 테일러에게 빚지고 있는 잔금을 모두 지불하는 일은 그와의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했다.


많은 고객들은 일 년에 한 번, 백 파운드 혹은 이백 파운드 상당의 수표를 정기적으로 보내어, 그저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 정도의 외상 빚을 유지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요금 청구서’를 모욕으로 생각했다. 고객의 호의에 의존하고 있는 테일러로서는 이러한 불가피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만약 이와 같은 가족 단위의 고객이 대금을 납부하지 않는다면, 테일러는 참을성을 가져야만 했다 – 그는 고객의 사망 이후, 그의 회계사로부터 잔금을 수금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대강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고객은 어느 날 갑작스레 가게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는 멈춰 서서 장부를 살펴본 뒤, -


“흠!”


“해리(그의 아들)가 빚진 것이 있나?”


이라 물었다.


“예, My Lord, 사실 있습니다.”


"얼만가?"


그는 그것을 지불하고서는 앞으로 해리를 신용해서는 안 되며, 그에게 더 이상 외상을 주지 말라는 당부를 덧붙일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와 같은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 만약 테일러가 순진하게도 그의 명령을 그대로 실행한다면, 그는 고객을 격분하게 만들 것이다.


“정신이 있는 건가? 응? 젠장! 내 아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11대 보포트 공작(Duke of Beaufort) 데이비드 소머셋, 20세기 영국의 대표적 댄디 중 하나였다. 이 블로그의 영웅 아보카토 지아니 아니엘리와 막역한 사이였다.


물론 이와 같은 관계에는 이면이 존재한다. 많은 저명한 가문들은, 특히나 존경받는 혈통의 가문들은 그들의 식솔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테일러는 그가 이러한 가문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테일러가 영주의 성 안에 사는 그의 식솔이었던 시대의 관습 때문에, 집안의 하인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만약 그에게 돈이 떨어졌다면... 그는 가족의 가장을 찾아가 그가 사실 이미 받았어야 하는 돈을 ‘빌릴’ 수 있었다. 또한 그에게 자본이 부족한 경우, 가족 중 한 명이 그가 필요로 하는 돈을 제공해 주는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것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 장인들은 보통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이와 같은 관계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외상은 이제 과거의 기억으로 남게 됐다. 저명한 테일러들은 보편적으로 현금 지불을 받고 있고, 세 달에 한 번씩 청구서를 배송하고 있다. 그것은 일 년 정산 시기에 법무관의 소관으로 돌아간다. 만약 외상이 허락됐다면, 고객은 그것을 직접 지불해야 한다 –그럴 경우 수트의 가격이 올라가거나, 혹은 일찍 지불되는 경우 할인이 제공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한적인 외상 역시 과거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옛 가문의 고객들에게만 허락될 뿐이었다. 과거에 비해 이들의 수입은 변함이 없건만, 그들은 5 기니 혹은 더 싸게 구입하던 장인이 만든 수트를 이제 50-60 파운드를 지불하고 구입해야만 한다. 이들은 오늘날 헨리 풀, 혹은 헌츠맨에서 사회의 새로운 지배자로 거듭난 이들(사업가)과 마주치게 된다. 이들은 250파운드 – 탈세의 결과인 – 정도는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니는 존재들이다. 벽 위 액자에 걸린 위임장과 로열 워렌트들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누렇게 변색돼 간다. The Khedive(이집트 총독), 포르투갈의 아마데오 국왕, 페르시아의 샤... [역시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전 헌츠맨 재단사가 설립한 Kent Lachter & Haste의 오랜 고객인 에든버러 공작 /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다.


새빌로 하우스들은 유럽 왕족의 족보(Almanach de Gotha)를 애타게 불러보지만, 많은 이름들은 이제 영원히 침묵을 지킬 뿐이다.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공작, 헤센 대공작, Friederich von Gottes Grunden Erzherzog von Baden, Prinz Christian of Schleswig-Holstein, His Serene Highness the Prince of Teck....


사회의 구조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지한 채 – 그들도 이구아나돈과 공룡처럼 멸종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이와 같은 귀족들은 태평스럽게도 테일러링 하우스들을 하나의 기관이자 전통으로 확립시켜 두었다. 그리고 테일러링은 행운스럽게도 이와 같은 왕족들의 뒤를 이어받은 [산업가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피의 수혈은 고객과 장인들 모두에게 활기를 공급하고 있고, 전통의 기술과 근대적 방식의 결합은 새빌로의 미래에 대해 조심스레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할만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60년대 새빌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