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닝머신 위에서 한 시간을 버티는 법

하늘이 도운 오늘의 운동 기록

by 모레바람


오늘 나는 작정을 하고 헬스장에 갔다. 한 달만에 도착한 헬스장 입구에 들어서며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떠올렸다. "런닝머신 위에서 한 시간을 버티는 법." 자신도 대책도 없었지만 그냥 브런치에서 생색이 내고 싶었다. 음 이 정도면 꽤 흥미를 유발하는 제목이 아닐까? 마침 지난주 목요일에 방영한 동백꽃 필무렵을 아직 못 본 참이었다. 앱으로 드라마를 틀어놓고 걷든 달리든 하다보면 한 시간쯤이야 금방 갈 것도 같았다.


런닝머신에 핸드폰을 가로로 눕히고, 영상을 재생하고, 귀에 에어팟이 단단히 꽂혔는지 확인했다. 속도는 6으로 맞춰놓고 시작. 1분: 아, 오랜만에 움직이니까 좋다. 2분: 속도를 9로 변경해서 달리기 시작한다. 4분: 아, 그만두고 싶다. 그냥 자전거나 탈까. 5분: 속도를 6으로 내리고 걷는다. 7분: 걷기만 하니까 심심하다. 다시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10분: 다시 속도를 6으로 내리고 걷는다. 15분: 속도를 8.5로 올리고 뛴다. 아 진짜 동백꽃 너무 재밌어. 20분: 꼭 한 시간을 채워야 하나. 그냥 한 시간 채웠다고 하고 글 써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21분: 그렇게 글 쓰면 나한테 뭐가 남나. 27분: 진짜 못해먹겠다. 내려가야겠다. 30분 채우고 내려가야지.


진짜 말도 안되게 딱 29분쯤 되었을 때, 핸드폰에서 동백이만 보고 있던 시선의 초점을 런닝머신에 연결된 TV의 화면으로 옮겼다. 30분 동안 단 한번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무음의 방송 영상에는 2019 한국시리즈 4차전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9회말 2아웃 만루, 두산이 1점 앞서나가는 상황에서 키움의 마지막 공격. 와, 야구를 챙겨보지 않는 나도 이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란 건 안다. 속도를 6으로 내리고, 핸드폰 영상을 일시정지 했다. 이럴 때는 에어팟이 불편하고만. 유선 이어폰이었더라면 연결선을 런닝머신에 꼽을 수 있었을텐데.


숨죽이며 집중하며 걸었다. 2스트라이크 상태. 키움 마지막 타자. 그리고 대망의 34분째, 키움의 동점타. 점수는 다시 9:9. 경기화면은 바로 광고로 전환되었다.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지만 이대로 내려갈 수 없다. 어느 편도 아닌 상태에서 막판에 경기를 보기 시작했지만, 나는 지금 온 마음을 다해 키움의 편이다. 우승은 모르겠고 지금 이 경기는 짜릿하게 키움의 역전승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그걸 볼 때까지 나는 못내려간다.


원래는 런닝머신을 다 뛰고 나서 집에 돌아가서 글을 쓸 생각으로, 매 시간 매 분마다 변하는 나의 마음가짐을 머리로 기록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런닝머신 올라온지 4분째 바로 내려오고 싶었다는 거, 내가 생각해도 참 어이없는 것 같아서. 그런데 34분부터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10회 초 두산이 10:9로 앞서나가고, 11:9로 격차를 벌리고, 10회 말이 되어 키움이 2아웃을 당했던 시점이 내가 런닝머신에 올라온지 47분쯤 되었을 때 였다. 그리고는 더 이상은 보면 괜히 실망하게 될 것 같아, 다시 핸드폰으로 동백꽃을 재생했다. 남은 시간은 10분 가량. 이 정도는 더 버틸 수 있다.


결국 2019년 한국시리즈는 두산이 우승했다. 그리고 나는 한 시간을 런닝머신 위에서 버텨내었다. 총 거리는 7.8km. 오늘의 기록은 왠지 하늘에서 내린 기록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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