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1. 18.
자기 자신이 세상에 존재함을 느끼기도 전에 인간은 수많은 조직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가족. 국가. 인간 사회. 이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선택을 하면서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고, 또 나옵니다. 구성원들을 정해진 규칙을 지키고, 관습을 유지하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면서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는데, 우리는 이를 소속감이라고 부릅니다.
인터넷에서 깊이 있는 정보를 얻고 싶을 때면 영어로 검색하곤 합니다.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그 답이 한 번에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 번역기를 사용하거나 같은 내용을 한글로 재차 질문합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영어권 화자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데, 그렇다고 누군가 "정말 영어가 모국어였으면 좋겠어?"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당연하지!"라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분명 정보획득이라는 면에서는 영어를 모국어로 가지는 게 훨씬 좋을텐데 왜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것일까요? 영어나 여타 외국어였으면 느끼지 못했을 무형의 감정을 나 스스로가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독서 열풍이 반짝 끓어올랐습니다. 한국 소설을 읽으면 느껴지는, 단어로 형체화 할 수 없는 무형의 감정을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함께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서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한국 소설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정겨움은 어디서 발원할 것일까요? 단순히 역자의 손을 거치지 않았기에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어떤 도서를 "한국 소설"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종현 선생님이 집필하신 '철학의 주요 개념' 서두에도 이와 비슷한 질문이 나오는데요. 당최 '한국 철학'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서양의 사고방식이 깊게 스며든 요즈음에 한국인이 구상하고 내놓는 철학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한국 철학'이냐 묻는 것인데, 선생님의 답은 한국의 절실한 사회 현안 문제와 관련이 있다면 한국 철학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철학을 어떤 문제에 대해 고민하느냐로 분류할 수 있다면, 문학은 앞서 말한 무형의 감정들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일례로, 저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외국인이 한국인보다 더 잘 이해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시간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시인의 쓰라린 마음, Mom이나 Mutter, Madre 등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한국인만이 느끼는 이 무형의 감정들을 다룬다면, 그것을 한국 문학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때의 '한국인'은 국적에 국한된다기보다는 우리가 표상하고 있는 한국사회 속 보통의 한국인을 지시한다 봐야 어색하지 않을 텐데, 이러면 다시 문학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문제가 생기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무형의 감정' - 그나마 '한'이 가장 가까운 의미라 생각하기는 하나 '무형의 감정'이 더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 봅니다 - 의 의미는 잘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이에 대해 더 깊게 다루는 것은 아예 다른 문제이기에 여기에서는 이만 줄입니다.
문학의 사례만을 들었지만, 영화, 스포츠, 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문화는 구성원들에게 배타성을 심어주고, 이는 더 결속력 있는 조직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속감을 긍정적인 거라 보아서만은 아니 됩니다. 함께 느끼는 공통된 감정은 조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구성원에게도 안정감을 가져다주지만, 자칫 잘못하면 국수주의, 우월주의와 같은 극단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우리는 비뚤어진 소속감이 어떤 참변을 가져다주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속감을 아예 없애는 쪽으로 나아가자는 주장도 있겠으나, 이는 실현될 수 없는 주장일뿐더러 또 다른 극단주의일 뿐입니다. 세상 누구와도 단절된 채 홀로 존재하는 인간을 상정하는 것은 한갓 사변에 불과하며, 그런 인간도 '인간'이라는 자기만이 원소인 집합에 속한 존재이니까 그렇습니다. 소속감에서부터 도망칠 수 없지만 너무 경도되어서도 아니 되는, 또 다른 중용의 덕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며 '중용'을 받아들일 때, 이 개념이 정말로 모호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만용과 소심 사이에 용기가 있고, 방탕과 쩨쩨함 사이에 배포가 큼이 있다고 하며, 이들을 중용의 덕이라 하는데 어디까지가 과도한 것이며 어디까지가 그렇지 않은 것이란 말입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나름대로 중용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각자 양쪽 극단에 서 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동체와 나를 동일시하여 생각하는 한 극단과 공동체와 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또 다른 극단. 소속 간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그 사이를 바라보는 중용의 자세입니다. 왼쪽을 보고 있던 사람은 오른쪽을, 오른쪽을 보고 있던 사람은 왼쪽을 보며 상대의 방향으로 한걸음 내디딜 때에서야 비로소 건강한 소속감을 향유하게 되지 않을까요. 개인주의의 광풍 속에서도 소속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인간이 행해야 할 일은 더더욱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