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내 말을 따라 해?

작지만 쓸만한 인생 팁 하나

by 모리화



“오늘은 청주 수업 있어요.”

“아, 청주 가? 몇 시에 와?”

“4시에 올 거예요.”

“아, 4시에 와?”

몇 번을 따라 하듯 같은 말을 되묻는 엄마.

무슨 확인을 저리까지 하시나 싶어 순간 얼굴이 굳었고,

그걸 본 엄마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깜빡였다.

내 반응이 그리 예쁘지 않다는 걸 눈치챌 법도 한데

여전히 내 말을 되묻고 있었다.

나는 원예치료 수업을 하면서 많은 어르신들을 만나왔다.

관련 자격증을 따는 동안,

노인학이나 심리상담학 과목도 공부하고

필수 요건인 논문을 위하여

“독거노인들의 우울”에 관한 작은 연구도 했다.

임상 실습 시간도 적지 않았고, 내친김에 사회복지도 공부했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반응을 ‘청각 저하’니 ‘인지력 저하’니 하며

너무 쉽게 진단하려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어설프게 알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태도였다.


어느 날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바쁘다고 위세를 부리며 나가려던 찰나,

90이 넘은 엄마의 눈망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게 뭐지?

한 집에 산다고 다 아는 건 아니었다.

그날 저녁, TV를 보고 있는 엄마의 옆얼굴을

한참이나 조용히 바라봤다.

순간 내게 독심술사 같은 능력이... , 그 눈엔 오래된 고백이 담겨 있었다.

당신 스스로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엄마는 늘 자식들 시간 뺏지 않으려고 지독히도 애쓰던 분이다.

80부터 10년 동안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 봉사도 하셨고,

바쁜 딸내미 도시락을 챙기며 부지런을 떨었다.

무엇보다 배우는 걸 좋아해 복지관도 다니시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익히려는 학구열을 지니셨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참 우리 엄마답다”며

칭찬 섞인 립서비스만 했을 뿐,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려 하진 않았다.

그렇게 홀로 고군분투하며 씩씩한 척을 하셨지만~


그래, 엄마는 심심하셨던 것이다.

우리 성인이 된 자식들이 부모를 생각할 때

대개는 ‘효도’라는 무거운 카테고리 안에서

용돈, 명절, 생일, 건강식품, 병원, 요양원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걸 다 챙기기도 사실 쉽지 않다.

현실은 빠듯하고, 각자의 여유도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효도’라는 단어 자체에

겁을 먹고 물러서버리는지도 모른다.

그 기준으로 보자면 나야말로 한참 부족한 자식이다.

그래서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무거운 리스트 사이에서

엉뚱하게도 ‘심심함’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건 저 리스트에 있는 목록이

제대로 충족되거나 아니거나 조건에 상관없이

저 안에 숨어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임이 많아도, 친구가 많아도, 여전히 아쉬운

내 핏줄과의 교감 같은 것 말이다.

그걸 너무 늦게야 알았다.


92세,

다리도 불편한 엄마와 뭘 하며 놀 수 있을까 고민하다

엄마의 옷장을 열고 제대로 코디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그렇게 조그마해진 것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일이 바쁘다는 걸 세상에서 제일 큰 위세로 알던

야속한 딸내미는 이제 정신을 차렸다.


자연스레 입지도 않고 넣어두기만 한 옷도 정리가 되었고,

차츰 내 옷도 같이 입어보고 하면서

엄마는 점점 멋쟁이 소리를 듣게 되었다.


순전히 가지고 있던 옷들로만 커플룩을 만들어 사진을 찍고, 영상도 남겼다.

이게 놀이가 된다는 사실이, 엄마도 나도 신기했다.

옷을 입혀주며 생기는 자연스러운 스킨십,

사진 찍으며 지어지는 표정들,

엄마의 기억력을 돕기 위해 만든 꽃말 퀴즈 놀이까지~

그 모든 순간이 교감이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콘텐츠’라는 보너스까지 생겼다.

“자식 찬스‘라는 건 대단한 파워였다.

30분 남짓한 단 한 번의 놀이에도

엄마는 오래도록 즐거워하셨고, 영상을 보고 또 보시며 웃으셨다.

그 짧은 교감이 마치 정신의 영양제처럼

오랜 시간 그 마음을 지탱해 주는 듯했다.

이렇게 엄마와 시간을 보내며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동안 반복되던 그 질문들은

말을 더 이어가고 싶다는 신호였고,

사랑하는 이와의 교감을 바라는 표현이었다는 걸.

아주 근사한 이벤트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큰돈이나 대단한 정성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처럼 심심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과

특히 자식과 나누는 교감은

효과가 몇 배로 증폭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효도’의 틀을 벗어나

‘함께 심심해지는 사람’으로 부모를 바라보는 것.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가벼운 접근이

오히려 더 깊은 정서를 만들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성인의 나이도 한참 지난 나의 아이들은

우리가 노는 모습을 보며 매번 재미난 피드백을 주는데,

그것 또한 우리 모녀에게 큰 즐거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난,

우리처럼 똑같이 나이가 들어갈 그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팁 하나를 전해준 것 같아서 아주 흐뭇하다.

그들에게도 누군가 자기가 한 말을 자꾸만 되묻는 다면,

나같이 짜증을 내거나, 냉정한 눈길을 주기 전에

그 이유에 대해서 한 번쯤이라도 생각해 보려고 할 테니까 말이다.


놀이라는 가벼운 접근이 만들어준 진짜 정서,

작지만 아주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양 스스로를 기특해하고 있다.

표정이 정말 많이 밝아졌지만,

엄마의 되묻는 버릇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제 그 이유를 알고 나니,

반복되는 우리의 티키타카조차 새로운 놀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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