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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May 12. 2018

내가 사랑했던 하이틴 로맨스들

 


중학교 때 내 책상은 ‘궁’ 캐릭터들로 가득 찼었다. 궁 노트, 궁 다이어리, 궁 샤프...  궁 만화는 물론 드라마 모든 화를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보았다. 매회 끝날 때마다 나왔던 테디베어부터 채경이의 실내화까지, 나는 등장하는 모든 소품을 갖고 싶었다. 궁은 내 인생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는데,  드라마 궁 키스신 덕분에 나는 키스는 코가 아닌 입으로 한다는 인생의 지식을 얻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궁의 키스신 장면 @안진희 다음 블로그

 

고등학교 시절은 대만 드라마 악작극지문(장난스런 키스)의 즈슈와 함께였다. 즈슈역의 정원창 사진으로 내 책상을 도배했는데, 덕분에 이 드라마를 모르는 반 친구들도 정원창은 알게 될 정도였다. 한국판 장난스런 키스는 대만판에 대한 의리로(?) 봤다. 워낙 연출과 연기력이 별로였던 드라마였기에 주변 친구들은 내가 그 드라마를 완주했다는 사실에 경악했었다. 한동안 나는 ‘나 한국판 장키 정주행 한 사람이야!’ 외치곤 했지.


악작극지문 포스터 

 

 지루한 수험생활을 지나면 하이틴 로맨스는 안 볼 줄 알았는데, 최근 중국 드라마 치아문단순적소미호 (아름다웠던 우리에게) 24화를 이틀 만에 정주행 했다. 주인공들이 서로의 마음을 못 알아챌 때마다 안쓰러워하고, 서로의 마음을 슬그머니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씰룩 씰룩 웃고 있는 나를 보며 깨달았다. ‘아 나는 정말 하이틴 로맨스를 좋아하는 애구나’  

    

아름다웠던 우리에게 포스터




 나는 왜 하이틴 로맨스가 좋을까. 음....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의 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여주인공이 멋있다고 생각하니까. 또 사랑을 위해 좋은 대학과 직장을 포기하는 남주인공과 상대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 줄 수 있는 여주인공을 보면, 역시 ‘사랑’이 중요한 게 아닐까 라는 헛된 희망을 잠시라도 품을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들을 보고 있으면 현실을 완전히 잊을 수 있어서. 그게 제일 좋다.   


 하지만 지금은 수험생활 때처럼 하이틴 로맨스를 맹목적으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럴 수가 없다. 드라마의 불편한 장면들을 볼 때면 자연스럽게 몰입이 방해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거칠게 다루는 모습이 솔직한 마음을 표출하는 장면으로 등장할 때, 남주인공의 스토킹이 질투심으로,  심지어 ‘귀여운’ 모습으로 다뤄질 때.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현실로 튕겨 나오는 기분이다.  학원물은 그릇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확립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하이틴 드라마 주인공들의 성격은 모두 비슷했다. 


여주인공: 귀엽다. 분명 이쁜 얼굴인데 주변에서는 모두 평범한 얼굴이라고 한다. 공부는 못하지만 따듯한 마음씨를 지녔다. 잘 웃는다. 말이 많다. 의도하지 않은 자주 사고를 친다.  

남주인공: 잘생겼다. 키가 크다. 공부를 잘한다. 상대를 자주 무시하며 배려할 줄 모른다. 타인과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조용하고 말이 없다. 여주인공이 위험에 처하면 늘 달려온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나는 남성들에게 무조건 ‘귀여워’ 보여야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강박에 시달렸다. 남주인공이 귀여운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찾는 표정, 그 표정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듯한 마음씨를 지닌 여성과 무뚝뚝하지만 능력 있는 남성의 조합이 '이상적인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느낌!! 

 

 나는 상대에게 귀여워 보이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거울 앞에서 눈웃음을 연습하고, 똑똑해 보이지 않기 위해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곤 했다. 가식은 늘 오래가지 못했고 나는 내가 기대하는 모습과 다른 내 모습에 속상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덜 사랑스럽기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물론 이제는 안다. 학원물에서의 여성 캐릭터는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의 모습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여성스러울 필요도 남성스러울 필요도 없다. 그저 우리는 우리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존중하면 된다. 획일적인 성관념을 강요하는 것은(예를 들면 너는 여성/남성스럽지 않아-라는 문장들) 그 자체로 폭력이다. 

 


   잘못된 성관념을 고착하는 하이틴 드라마의 클리셰들은 분명 바뀌어야 한다. 지금의 여성들이 꿈꾸는 사랑은 이전과 다르다. 페미니즘의 변화를 거친 우리는, 무엇이 폭력이고 사랑인지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2017년작 ‘아름다웠던 우리에게’에서 여주인공인 천샤오시는 남주인공 장천에게 이렇게 말한다.      


항상 다른 사람이 네 생각이 뭔지 알아주길 바라지.
(중략) 하지만 난 이제 진짜로 네 생각이 뭔지 알려고 하지 않을 거거든


 천샤오시의 대사는 모든 하이틴 드라마를 관통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관계가 끝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성이 돌봄을 포기하는 순간, 즉 너를 사랑하는 것에 지쳤다고 말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런 순간이 오면 남주인공 들은 긴장 한다. 더 이상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관계에서 남성이 설 위치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상대의 눈치를 계속 살피고 마음을 보살피는 건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남성의 무심함은 미덕이 아니라 소통의 불능일 뿐이다.      


 아름다웠던 우리에게서 가장 반가웠던 캐릭터는 ‘린징샤오’라는 여성 캐릭터였다. 기존 학원물에서 능력이 뛰어나며 이쁜 여성 서브 캐릭터는 대부분 남주인공을 두고 여주인공과 대립하는 악역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린징샤오는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하는 이쁜 여성 캐릭터이지만 여주인공 천샤오시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그녀는 위기에 처한 남성 친구를 구출해내기도 하고, 놀림을 받는 반 친구를 제일 먼저 일어나 보호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과학(천문학)’에 그 누구보다 뛰어나며, 천문학자를 꿈꾼다.

     

린징샤오 최고!!


나는 린징샤오가 드라마의 주인공인 드라마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주체적인 여성이 자신의 사랑을 찾아 나서는 학원물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성애자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LQBT의 사랑이야기도 학원물에서 다뤄진다면 더 좋겠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하이틴 로맨스를 보고 자란 세대는 분명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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