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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May 31. 2018

성별이 스펙이 되는 현실

1.

 세어보니 나는 지금까지 20번이 넘는 면접을 보았다. 아르바이트, 인턴, 게약직, 정규직 등.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열심히 지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마다 갇힌 공간에서 함께 면접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의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나와 비슷한 직무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에 여기에 지원했을 테고, 서류와 필기를 통과했으니 스펙도 비슷할 테니까. 난 그들을 보면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신기한 건, 나와 같이 면접을 기다리는 지원자들은 대부분 여성이 남성보다 1.5배~ 2배 많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문과에 비상경계열 졸업생 여성이 지원할 수 있는 직무가 한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 서울 대학 사회과학 전공 졸업생(비상경계열)인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직무는 크게 기획/영업/마케팅 정도니까. 가뜩이나 적은 채용 공고 속 성차별적인 사내 문화를 가진 기업은 피하고, 불법임에도 '남자'만 지원 가능하다고 적힌 공고는 피하고, 법에 명시된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 기업을 피하다 보니 내가 지원 가능한 기업은 별로 남지 않았다.


 몇 번의 면접을 거치다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분명 면접에서는 여성 지원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최종 합격자에서는 남성이 많거나, 절반이었다. 내가 최근에 치른 면접은 여자가 14명, 남자가 7명이 참석했지만, 합격자는 여자 3, 남자 3이었다. 남성 지원자 중 42%가 합격을 했고, 여성지원자의 21%가 합격한 것이다. 이 경우는 합격자 수가 매우 적기에 다양한 변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어 유의미한 수치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분명 나는 이런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고 있다.


2.

 취업박람회나 채용 카페에서 나오는 말들이 있다.  

토익 남자면 900만 넘어도 괜찮은데. 여자는 최소 950은 넘어야 해요.
여자들은 아무래도 출산이나 결혼하면 회사 손실이니까 잘 안 뽑으려 하죠.
여자들은 좀 끈기가 없지 않나요?
이 직업은 아무래도 남성을 선호하긴 하죠


 내가 외교관을 꿈꾸었을 때, 교수님은  "여자들은 멀리 파견 보내기 어려우니까 아무래도 남자를 선호하지"라고 말했고, 언론사 채용설명회에 패널로 나온 현직 기자는 "출산과 육아 때문에 아무래도 여성을 채용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기자가 워낙 술을 많이 마시는 직업이다 보니까"라고 말했으며, 내가 한 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 상사는 남자 동기에게 "이번에는 남자를 뽑아야겠어. 여자들은 부려먹기가 힘들어"라고 말했다. 물론 이 모든 말들은 여성을 잠재적 '엄마'와 '생계 보조자' '약자'로 보는 성차별적인 언행이었다.


 기업이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응시자와 최종합격자의 성비 비율을 공개하지 않고 채용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여성들은 자신이 정말 여성이기에 떨어진 건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면,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의 성별 때문에 떨어졌다고 생각하기보단 자신이 부족해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자는 정말 해결 방법이 없지만 후자는 자신이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연하게 '같은 스펙이면 남자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혼자 속으로 삭힐 뿐이다.


여자를 안 뽑는다지만 나는 다를 거야. 나는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라고 믿으면서.


3.

 채용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성차별은 2가지이다.

1) 면접 과정에서 여자 지원자와 남자 지원자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경우

2) 하나은행과 국민은행처럼 대규모 채용에서 드러난 점수 조작


 이런 경우들은 증거도 명확하고 인원이 크기 때문에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가 있다. 여성 지원자에게만 남자 친구 유무와 출산 계획을 묻는 것은 면접 과정에서 흔한 성차별이다.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 이번 하나은행과 국민은행 (신한은행 또한 정황은 있다고 한다)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다. 남자라서 서류 점수를 더 주고, 남자를 더 많이 선발하도록 처음부터 기준을 두었다는 뉴스를 보며 나는 금융권 취업을 준비하던 동아리 선배 언니가 떠올렸다. 그 언니는 이번 뉴스를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내가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건, 명확히 드러나는 성차별 이외에도
우리가 '공공연하게'알고 있지만 증거가 없는 성차별이 많다는 것이다.
왜 인적성 이후 1차 면접에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최종면접까지 가면 여자가 별로 없는 걸까?
 최종면접에서의 성비는 왜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 걸까?  


지금까지 여성들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우리가 무능해서'라고 대답해왔다.

 

4.

 취업카페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차피 최종면접까지 온 사람들이라면 실력은 비슷하다' 취준생들이라면 대부분 동의하는 문장이다. 성별을 떠나서 우리는 대부분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 그 직무에 어린 나이부터 몰두한 사람들을 소수의 지원자를 제외하고는 솔직히 다들 비슷한 학창 시절과 스펙을 쌓아왔다. (그러니 모두들 자소서 작성을 어려워하지) 게다가 서류, 인적성(필기)을 거쳐 1차 면접도 통과한 사람들이라면, 그냥 다들 비슷하게 똑똑한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 비슷한 사람들 중에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결정하는 건 대부분 남성 고위 관료들이었다. 면접 평가 기준인 태도, 적극성, 신뢰성, 협동성, 직업관 등은 모두 주관적인 관념이기에 평가 과정은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 프레임 안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면접관들도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를 살아온 평범한 남성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을 배우는 나도 매일 여성혐오를 하고 있는 내 자신과 마주치는데, 과연  이전 세대의 한국 남성들이 여성혐오 프레임 밖에서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5.

 누군가는 반론한다. "기업이 뽑고 싶은 사람 뽑겠다는데 그게 문제야? 국가가 개입하는 건 기업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지!" 이 질문에 손희정 문화 평론가는 답한다. 정체성이나 신체적 특징 등 한 개인의 특성에 따라서 기회를 박탈하고 선택을 제한하며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차별'이라고 부른다고,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해 국가는 법을 만들어 차별행위를 처벌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기업이 모든 채용과정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응시생들은 '차별'이 이뤄졌으리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얼마 전 하나은행과 국민은행 사건이 터지자, 모든 기업들을 대상으로 신규 채용 시 여성 비율이 현저히 낮지 않은지 감시하는 제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시민단체는 각 기업이 신규 채용 성비 - 응시자 성비 비율 대 최종합격자 성비 비율을 공개하는 것을 첫 시작으로 삼았다. 만약 기업이 정확한 평가기준에 입각해 채용을 했다면 성비를 당당히 공개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바라는 건 적어도 모든 응시자가 채용은 공정하고 차별 없이 이뤄졌지만 '내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졌구나"라고 믿어도 되는 세계. 이 당연한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것. 그뿐이다.

  




*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142121005&code=990100 


** 표지 사진은 드라마 라이브 캡처 장면입니다. 여성들이 면접장에서 자주 겪는 성차별을 묘사한 장면이에요.  

https://tv.naver.com/v/284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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