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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Jun 09. 2018

우아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나는 '우아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어떤 우아함이냐면, 내가 좋아했던 '몽상가'들의 이사벨 같이 자유롭고 매혹적이며 쿨한 여자. '몽상가들' 영화에는 이사벨이 남성들과 같이 목욕하는 도중 생리가 터지는 장면이 나온다. 당황하는 남성에게 이사벨은 새삼스럽냐는 말투로 '그거 생리야'라고 툭 내뱉는다. 쿨하면서 당당한 이 여성,  내가 그렸던 페미니스트는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배울수록, 이 사회에서 여성이 '쿨하면서 당당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선 사회에는 받아들여지는 말들과 무시되는 말들이 있었다. 똑같은 말을 했는데 남자가 했을 때는 '당당하고 권위적인' 말이 되었지만 여자가 하면 '기가 센'말이 되는 걸 목격했다. 여성들의 말은 자꾸 지워졌고 남성들의 말은 너무 쉽게 받아들여졌다. 


나는 당당하고 솔직하게 내 의견을 말한 건데, 

사람들은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또는 '여자애가 기가 세네'라고 답했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까 봐 두려워졌다. 나는 페미니즘을 말하면서도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페미니즘으로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들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미움받지 않을 정도로만 페미니즘을 했다. 사회에서 논쟁이 벌어지면 

'좀 더 맥락을 봐야 하지 않을까?' 
'그건 지나친 일반화가 같은데'
'너의 뜻에는 동의하지만, 방법이 과격한 것 같아'

라고 말하며 중립적인 척했다. 


그래서인지 내 주변에는 페미니즘 문제로 상담하는 남성들이 많았다. 그들의 질문은 대체로 비슷했다. '00와 페미니즘 문제로 싸웠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말 너도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나는 '물론 그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네가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해' 라면서 쿨하게 대응했다. 그리고 비겁하게, 사회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앞장서서 페미니즘을 외치는 분들 뒤로 숨었다.


출처: sbs 뉴스



언제부터였을까. 마냥 뒤에서 숨어있던 내가 조금씩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던 게. 

사랑하는 친구들이 지하철, 길거리에서 성추행당해서 경찰서에 다녀왔을 때?
자주 다녔던 공중 화장실에 몰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퀴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조롱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끝없이 약자를 무시하는 사회는 나를 계속 앞으로 밀어냈다. 

나는 정말 쿨하고 싶었는데, 이 상황에서 쿨하면 미친 게 분명했다. 

부당한 차별에 대한 마땅한 대응은 '인내와 무시'가 아니라 '분노'라는 걸 매일 느꼈다. 



페미니즘을 더 크게 말하고, 쓰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브런치도 그중 하나였다. 일상적인 경험을 페미니즘과 연계시키고 싶었다. 더 많은 여성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얼마 전에 올린 글도 그런 마음으로 썼다. 모든 성이 심각한 취업난을 겪고 있기에 민감한 주제였고 특히 군대 2년 경험과 기업에서의 남성 선호를 연계시키는 말도 안 되는 반발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부러 남녀 임금격차, 경력단절, 인사채용자들의 남성 선호 등의 구체적인 수치를 넣지 않았다. 이미 많은 언론에서 다루고 있기도 했고, 그것보다 나는 여성이 느끼는 무력감을 강조하고 싶었다. 나와 내 주변의 사적인 경험들로 채웠다. 사회 질타를 받을까 봐,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이 없어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 


그리고 역시나,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처음에는 놀랐다. 그리고 댓글들을 읽으면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왜 자신의 통념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을까? 


취업은 오로지 개인의 능력으로 결정된다.

한국사회에 성차별은 없다. 

기업은 당연히 효율성만을 따져야 한다. 

한국 페미니즘은 잘못된 페미니즘이다. 


그 잘못된 믿음들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그들을 보며 나는 내가 그 글을 쓰기 전까지 스스로를 의심했던 시간들이 안타까웠다. 나는 늘 내가 적절한 논리를 가져오지 못할까 봐, 혹시라도 나의 글이 누군가에 대한 혐오를 담을까 봐 너무 두려웠는데, 그래서 그 글을 쓰기까지도 얼마나 고민했는데. 



한때 나는 대화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논리적인 대화를 하면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회가 여성들의 말을 얼마나 억압하고 있는지. 페미니즘 시위가 너무 과격하다고? 약자의 저항은 그 사회가 약자에게 억압을 가하는 정도에 비례한다. 나도 진짜 우아하게 대화로 해결하고 싶다. 하지만 고운 말로 하면 '논리가 빈약하다' '너의 피해의식이다' 하며 그냥 무시해 버리는 사회다. 


정희진 학자의 글*은 지금을 정확히 설명한다. 

한국 사회의 일부 진보 진영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개념 중의 하나가 ‘대화’와 ‘폭력’이다. 이들은 대화와 폭력을 대립시키면서, 자신을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주주의 세력으로 자칭한다. 노! 민주주의는 폭력 대신 대화를 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삶에서 대화로 해결되는 문제는 거의 없다. 평화학자 신시아 인로는 “완벽한 대화는 군대에서만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합의 가능한 대화는 명령뿐이라는 얘기다.  ‘을’은, ‘갑’과 말이 안 통하는 일상을 산다. 대화가 안되기 때문에 저항하는(‘폭력을 쓰는’) 것이다.

(중략)  모두가 동등한 관계에서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다면, 유토피아다. 민주주의는 대화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대화를 쉽게 생각하는 이들은 권력자들이다. 그들은 글로벌 시대 미국인처럼 자기 언어가 보편적이라고 믿는다. 남성 중심적인 인식과 용어는 ‘영어’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남성’ ‘백인’ ‘이성애자’들은 ‘여성’ ‘유색인’ ‘동성애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통념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아한 페미니스트는 불가능하다. 


모두가 동등한 관계에서 대화할 수 조차 없는 지금, 내가 무슨 수로 우아하게 페미니즘을 외칠 수 있겠는가.

그저 나는 최선을 다하는, 열심히 외치고 행동하는 여성이 되려고 한다. 

분명 앞으로 분노할 일이 더 많겠지만, 그것이 옳다는 걸 알기에 멈출 수 없다. 

당신들이 아무리 짖어대도. 



* 정희진 학자 글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152110015&code=990100#csidx77cd2700ba6a4889aedd252ae3e62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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