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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Mar 20. 2018

3. 진은영 시인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창작과 비평)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락을 찔렀지    


엄밀한 공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 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 모양의 얼굴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이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 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눌어붙는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을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나는 멀리서 너의 세탁소를 바라봐. 너에게 안부를 묻고 싶은데, 네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봐 두려워. 우리는 그저 상냥하면서 예의 바르게 참 좋다, 멋지다, 고마워 이 정도의 말만 건네야 하는 사이일지도 모르잖아. 보여주는 것만 보고 보이는 것만 믿고, 가볍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사이. 네가 나에게 바라는 건 그 정도의 온도일지도 모르니까 조심스러워.      


 있잖아, 나는 늘 네가 너의 옷을 다 불태워 버릴까 봐 두려웠어. 내가 너무 늦어서 불에 탄 옷들만 발견하게 될까 봐. 그게 늘 두려웠어. 그래서 너를 진짜로 영영 잃어버릴 것 같은 날에는 눈 질끈 감고 세탁소 앞으로 걸어갔지. 너는 오늘도 세탁소 안에 있는 것 같고, 나는 너의 이름을 크게 부르기만 하면 되는데.    

  

 네가 세탁소 문을 환하게 열어준다면, 나는 그 옷들을 마주할 용기는 있는 걸까. 만약에 그곳에 내가 맡긴 옷이 있으면? 나는 잃어버리고 너는 기억하는 그런 순간이 있을 수도 있잖아. 무엇보다 ‘위생학의 대가’인 내가, 너의 옷들을 보며 ‘안도’하면 어떡해. 너의 세탁소에 들어가고 싶은 이유가, 너의 ‘천부적인 더러움’을 사랑해서였다면?      


 결국 나는, 나의 세탁소로 돌아와 오늘 입었던 옷을 높이 걸어. 이건 비겁하고 속물적인 ‘고백’, 절대 너에게 닿지 않았으면 하는 고백. 언제쯤 위의 시 제목처럼 세탁소가 아름답다고 느낄까? 내 천부적인 더러움도 어쩔 수 없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체념일까 성숙일까?  

    

 그런 날, 내가 씩씩하게 오늘 입었던 옷의 먼지를 털어낼 수 있는 날. 너에게 내 세탁소를 보여주고 싶어. 그러니 부디 그 날까지 잘 지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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