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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Nov 03. 2018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나는 당신에게 보낼 카드를 샀다

#5

 

 토요일 아침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은 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코펜하겐으로 향하는 길목이어서 큰 화물차들이 자주 다니는 학교 옆 큰길을 따라 15분을 걷다 보면 구시가지에 도착하게 된다. 올드 타운은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도시의 큰 길목은 노란 별 전등으로 채워져 있었고,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상점들은 저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옷 가게들은 울 양말과 빨간 목도리들을 가게 앞에 내놓았고, 동네 명물인 치즈 가게는 산타할아버지가 루돌프를 치즈 위해 앉혀 놓았다. 소품샵에서는 역시나 다양한 길이와 색깔의 초들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밤이 길고 백열등을 쓰지 않는 덴마크 인들은 초를 정말 사랑한다. 한 밤에 산책하다 보면 통 유리 사이로 노란 불빛의 초들 이 일렬로 일렁이는 거실 한 벽면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도시의 냄새도 평소와 조금 달랐는데, 한국의 식당 길거리에서 맡을 수 있는 빨갛고 끈적한 냄새가 미세하고 공기에 섞여있었다.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찾으려고 길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히 서점 앞에 닿았다. 이 도시에는 3군데의 서점이 있는데 덴마크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나는 한 번도 서점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서점 앞 진열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고 잠시 멈추었다.


 이 곳에 와서 가족과 당신을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8시간이라는 시차도 컸지만, 카톡으로 "잘 지내?"라고 물을 때마다 이 말의 의미가 너무 가볍거나 크다고 느꼈다. 잘 지내? 응 잘 지내. 그다음에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요새 뭐하고 지내는지 보다 나는 네가 어떤 마음으로 지내는지가 궁금한데 카톡의 '잘 지내?'라는 질문으로는 절대 그 마음에 가닿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늘 들었다.


 그렇지만 곧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지, 이 곳에 있을지 모든 게 불투명했지만, 어쨌든 크리스마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크리스마스였다. 8,000km나 떨어진 이 곳에서 내가 카드를 보낸다면, 조금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따듯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점 안으로 들어갔고 서점의 한쪽 긴 벽면을 꼬박 채운 엄청난 양의 크리스마스 카드들에 압도되었다. 서점 안에서는 이미 다양한 사람들이 카드를 고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 노부부가 인상 깊었는데, 두 분은 여러 디자인의 카드 앞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카드를 골똘히 고르고 있었다. 중간에 할아버지가 포장지를 고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을 제외하고는, 두 분은 한참을 서서 여러 장의 카드를 손에 들고 덴마크 어로  이야기했다. 덴마크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가 좋아할 색깔과 모양이 무엇 일지 고민하는 중이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카드를 보낼 친구들을 떠올렸다. 오래된 나의 친구들.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그들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을 골랐다. 혹시나 놓친 사람들이 있을까 봐 카톡 친구 목록을 확인했다. 이 친구에게는 카드를 보내고 싶지만, 아마 받으면 놀랄 것 같아. 이 친구는 내 카드를 받고 싶을지도 모르지.


먼 곳에서 카드를 보낼 사람을 고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주소를 쉽게 물을 수 있을 만큼 친밀해야 하면서 동시에 우편이 도착할 때까지, 어쩌면 한 달이 넘을지도 모르는 시간을 기다려 줄 수 있을 만큼 신뢰가 있는 관계.


 그렇게 생각하자 가장 가깝고 친밀한 당신에게 보내는 게 막막해졌다. 우리는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자주 통화를 하는데 카드로 따로 적을 말이 있을까. 그리고 불안했다.


 당신에게 이 카드가 도착할 때까지 우리가 함께일까?


하지만 곧 크리스마스였다. 나는 당신에게 가장 따듯한 말을 주고 싶다. 그게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산타가 그려져 있는 카드를 당신의 것으로 골랐다.




 밖으로 나와 다시 학교로 향하는 길. 나는 소품샵에서 보았던 저렴한 갈색 루돌프 실내화가 한 소녀의 품에 꼭 안겨있는 걸 보았다. 소녀는 정말 행복해 보였고, 나는 내가 산 카드들을 품에 꼭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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