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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Feb 01. 2019

안경 쓰고 넓적한 얼굴



W에게 


나는 안경 쓰고 넓적한 내 얼굴을 어릴 때부터 싫어했어. 중학교 때 우리 아빠가 너랑 나 도서관에 태워다 줬던 거 기억나? 그때 네가 아빠랑 나랑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잖아. 나 그 말 정말 싫었다. 아빠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농담 반으로 이렇게 얘기했거든.


    자식들한테 좋은 외모를 주려고 이쁜 네 엄마랑 결혼했는데, 너는 왜 나를 닮았니.


아빠는 농담으로 한 이야기였겠지만,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내 외모에 만족해본 적이 없어. 엄마는 갸름한 얼굴에 코도 높은데 나는 엄마랑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거든. 외가에서는 엄마를 닮은 동생을 더 좋아했고, 친가에서는 아빠를 똑 닮은 나를 좋아했지. 그래서 였을까, 전 남자 친구가 내 가족사진을 보다가 나에게 '너는 아빠보다 엄마를 더 닮았구나'라고 말했을 때 너무 기뻤어. 나에게 엄마를 닮았다는 건 예쁘다는 이야기니까. 


 덴마크에서 나는 안구건조증으로 렌즈를 끼지도 못해 두꺼운 안경을 쓰고, 미용실이 너무 비싸서 머리를 다듬은지도 오래되었어. 얼마 전 누군가 찍어준 사진 속 내 이중턱에 깜짝 놀랐다 정말. 급히 체중을 재보니 4킬로가 쪘더라. 나는 살찌면 다 얼굴로 가나 봐. 바지는 여전히 잘 맞는데 얼굴만 커진다니까? 


두꺼운 안경 속 한없이 작은 눈, 넓적한 턱 윤곽, 밋밋한 눈코입, 이중턱. 


갸름한 얼굴에 나팔바지를 입어도 태가 나는 노르웨이 친구, 커다랗고 동그란  청록색 눈의 독일 친구, 근육진 몸이 균형을 이룬 멕시코 친구, 히피 풍의 의상들을 멋지게 소화해내는 미국 친구, 브라운 계열의 코르덴 의상을 멋지게 소화하는 덴마크 친구를 볼 때마다 나는 자꾸만 의기소침해져. 이쁘고 잘생긴 친구들을 보면 동경하는 동시에 나 자신을 미워하는 이 익숙한 감정이 또 찾아온 거지. 





 우리가 같이 처음 본 영화가 '미녀는 괴로워'라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상징적이야. 중학교 1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가 끝난 날 뭐하며 놀지 1달 전부터 고민했잖아. 영화를 보고 떡볶이를 먹기로 합의를 본 후에도 미녀는 괴로워냐 아니면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냐 하는 문제로 대립했지. 결국 미녀는 괴로워를 택했는데, 왜 그랬더라? 내가 기억하는 건 그 영화가 끝나고 "난 너무 예뻐" 노래를 부르며 길거리를 뛰어다녔다는 것, 그리고 나도 대학생 되면 이뻐질 거야라고 다짐했다는 것뿐이야. 




네가 중학교 때 나를 감자도리라고 불렀던 것 기억나? 동그란 얼굴에 피부가 하얘서 어릴 때부터 보름달. 감자. 찹쌀떡 등으로 불렸는데 나는 그 별명들이 너무 싫었어. 중학교 때 V라인 옥수수수염차 광고가 유행했잖아. 세상 모든 사람이 V라인을 외치는 데,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은 사각형에 넓적한 거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안경을 써서 코는 무거운 안경에 한없이 눌려있고. 눈코입 뭐하나 뚜렷하지 않은 내 얼굴이 싫었어. 


김아중이 영화에서 외모 변신을 통해 다른 인생을 살았듯이, 

나는 내 얼굴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고 싶었어. 


그 다른 삶이 무엇일지는 경험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보다는 훨씬 윤택하지 않을까 기대했지. 새로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먼저 와서 말을 걸어주고, 나의 부재를 누군가 알아채 주는 것. 그런 자그마한 관심들이 너무 절실했어. 


수능이 끝난 우리에게 이뻐진다는 건 안경을 벗고, 살을 빼고, 메이크업을 하는 것. 쌍꺼풀 수술을 받아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칼이 너무 무서워 포기. 경락받으면 얼굴 갸름해진다고 해서 혹했는데, 네가 먼저 해보고는 너무 아프다고 해서 나는 패스. 대학 들어가기 전 겨울방학에 너는 매일 겟 잇 뷰티 프로그램을 챙겨보고 헬스장을 끊었지. 손재주가 없어 메이크업 조차 어려웠던 나는 안경이라도 벗어나 보자 하는 마음에 대학병원 안과까지 드나들었잖아. 하지만 심한 초고도근시여서 라식/라섹도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3번째 병원에서 들었을 때, 그제야 단념했어. 렌즈삽입술은 너무 무섭더라고. 





대학교 때 안경끼고 학교 가는 게 무서웠어. 

나는 안경 낀 모습과 벗은 모습이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잖아. 남자인 친구가 2년간 렌즈 낀 모습만 보다가 결막염으로 안경 쓰고 나타난 나를 보고 "와 몰라봤어. 그 안경 뭐냐. 잠자리 같네'라고 했을 때 화났지만 반박하지 못했지. 창피했거든. 안경을 쓰고 학교를 가는 날에는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두려웠어. 눈이 너무 아파서 렌즈가 안 들어가거나, 렌즈를 잃어버리거나, 시험기간에 잠을 자지 못해 눈이 충혈되었을 때는 난감했지. 어쩔 수 없이 안경을 끼고 갔던 날에는 계속 숨어 다녔어. 동아리 방도 가지 못하고, 수업도 뒷자리에서 듣고.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안구건조증이 있어서 렌즈를 매일 끼는 게 어려운데, 렌즈를 착용한 날과 안경을 쓴 날은 내가 세상에 참여하는 정도가 달라. 렌즈를 낀 날은 자신감이 생겨서 적극적으로 내 주변 세상과 소통하지. 문제는 외모에 자신감이 없어서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날에는 방에 돌아와서도 너무 속상하다는 거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까지 강박적인 걸까. 





외모에 대해서는 어디까지가 나의 선택이고, 어디까지가 타인의 영향인 걸까?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인간이라면 성에 관계없이 외모 압박감을 느껴. 솔직히 우리도 처음 보는 사람이면 외모부터 보잖아. 그러니 남들도 내 외모를 보는 건 당연하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외모 압박감을 느끼는 정도가 성별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거야. 외모 자신감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높으며,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외모에 투자하지. 최근 흥미로운 논문을 발견했는데, 한중일 여성들이 외모에 강박을 가지는 요인이 개인적인 만족감 보다도 외모가 직접적으로 하나의 계급과 경쟁력이 되는 사회 구조 때문이라는 연구였어. 


@jtbc




우리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따르지 않았을 때의 사회적 시선 또한 잘 알고 있잖아. 

너의 전 애인이 '뚱뚱한 사람은 자기 관리를 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했을 때, 

내가 렌즈를 끼고 간 날 학과 선배에게  '확실히 안경보다 렌즈 낀 게 더 보기 좋네. 항상 그렇게 좀 신경 쓰고 다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화내기보다는 창피해했지



있잖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해. 취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학 교수가 너와 단 둘이 있을 때 

"너의 화장과 목소리는 남자를 꼬시기 좋아"라고 말했다고 했지.

나는 그 이야기를 전화기 너머 듣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성희롱으로 고소해야 된다고 소리 지르고 있었는데 


내 메이크업이  천박한 여자처럼 보였던 걸까?


라고 네가 자책하는 순간 나는 무너졌어. 네가 한 거라고는 피곤한 안색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풀메이크업을 한 것뿐이었잖아. 메이크업을 안 해도, 해도 문제가 되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는 탈 코르셋 논의와 같이 이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책을 같이 찾아 나갈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해외에 나오니 더 복잡해. 혹시 구글에 Asian women이라고 쳐본 적 있어? 한번 해봐. 수많은 기사들이 '어떻게 아시아 여성과 데이트할 수 있는지' 알려 줄 거야. 외모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서 서양 백인 남성들이 아시아 여성에게 기대하는 '이미지'가 존재해. 친절하고 다정하며 수동적인 여성. 그리고 그 기대를 대놓고 보이는 남성들이 정말 있다니까? 와 이건 성/인종/외모/문화 모든 게 합쳐진 종합 선물세트 같은 문제더라고.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있어. 


혹시 길모어 걸스라는 미국 드라마 알아? 한 모녀의 삶을 그린 드라마인데 거기서 한국계 미국이라는 설정의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 '레인'이 등장해. 



버즈피드



길모어 걸스가 페미니즘 적으로 훌륭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에서 레인을 다루는 방식은 논쟁적이야. 레인은 지독히도 속물적인 한국인 어머니를 두고 있는데, 주인공 로리의 삶의 긍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작가는 레인의 가족 문화(한국-아시아-보수적-시대에 뒤떨어진)와 로리 모녀(미국- 진보적- 이상적)를 대비시키지. 


아 갑자기 이야기가 새 버렸다. 어쨌든 나는 레인의 캐릭터를 보면서 화가 난다기보다는 슬펐어. 특히 레인이 로리의 아름다운 얼굴과 인기를 부러워할 때마다 공감이 가는 거야. 레인은 멋진 캐릭터이지만, 내가 보기에도 푸른 눈에 예쁜 로리에 비해 덜 매력적이었어. 학교에서 모든 남자 애들이 로리를 좋아하고 레인은 짝사랑을 하는 설정은 충분히 설득력 있었지. 오랜 시간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지 않은 채  레인이 로리 옆에서 좋은 친구로 남는다는 설정이 가장 허구적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 곳에서 나는 레인이 된 기분이야. 누가 봐도 나는 로리 보다 레인을 훨씬 닮았으니까. 



이 글을 쓰면서 감자칩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1시간 고민했는데 결국 먹었어. 먹고 났더니 이중턱이 더 쳐진 느낌이야. 그래도 이렇게 쓰고 나니 좀 후련하다. 그리고 다시 열 받네. 혹시 그 교수가 또 개소리했니? 내가 이 곳에서 너무 화낼까 봐 이야기 안 해주는 거 아니지? 그보다 더 심한 이야기를 했으면 진짜 학교에 신고해야 해 W. 그 교수는 아주 오랜 시간 그런 성차별적인 발언들을 해왔을 거야. 근데 수업시간마다 ' 이 전공 바닥 좁으니 나에게 밑 보이면 취업 어려워'라고 말한다니 아무도 나서지 못한 거겠지. 


너는 내가 힘들 때 그냥 옆에서 같이 울어주는 친구였어. 그저 내가 슬퍼 보이니 너도 슬프다며 같이 울었잖아. 함부러 조언하거나 평가하지 않았어. 너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야.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 그러니 이 거지같은 세상에사 같이 울자. 우리 같이 울고 또 같이 웃어버리자. 


아 편지 쓰니까 보고 싶다. 나는 살찌고, 피부는 얼룩덜룩, 머리는 엉망이지만 더 밝아진 모습으로 돌아갈게. 



- 2019년 1월의 마지막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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