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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Mar 04. 2019

화장실 청소일을 하다 보면



T에게 



 머리가 노란빛으로 갈라 부서지는 걸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MATAS에 갔어. 직원이 내 머리를 보더니 하늘색 호리병 모양에 담겨있는 샴푸를 추천해줬는데 25% 세일해도 100kr (약 만 팔천 원). 한국에서는 샴푸가 얼마였더라? FAKTA에 가면 분명 더 저렴한 샴푸를 살 수 있겠지만, 눈 딱 감고 샀어. 섬에만 지내다 보면 취향을 잃게 되는 기분이거든. 레몬향 바디워시로 몸을 씻고 나와 달콤한 장미향의 바디로션을 바르면 피어오르던 만족감이 그리울 때가 있거든. 나중에 인터넷에 찾아보니 스웨덴 왕실에서 쓰는 샴푸라더라.  


요새 아침마다 하늘색 병에서 500원 동전 모양만큼 샴푸를 덜어내서 머리를 감는 일이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야. 샴푸는 진주빛이 돌고 머리에 부드럽게 감겨. 달콤한 향을 킁킁 맡으며 머리를 감고 하루 일을 시작해. 스웨덴 왕실과 머릿결만은 비슷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으며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학교의 화장실 3곳을 청소하는 거야.

달콤한 향을 맡으며 커피를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지만 현실은 파란색 고무장갑과 걸레를 들고 더러운 화장실 문을 여는 거지. 


부모님과 한국에서 같이 살 때, 나는 한 번도 화장실 청소를 해본 적이 없었어. 덴마크 국제학교에 있을 때 처음 해봤는데 그때도 같은 화장실을 쓰던 일본인 친구가 바지런하게 청소를 해줘서 나는 다른 곳을 청소하곤 했지. 그런데 덴마크 섬에 와서 처음으로 청소일을 하게 된 거야. 그것도 화장실 청소를. 


처음에 내 담당자인 사라가 어떻게 청소하는지 알려줬는데 생각보다 힘이 들더라. 특히 

1) 변기를 솔로 닦기 위해 오랜 시간 허리를 구부려야 하고, 

2) 싱크대가 반짝반짝 윤이 나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완벽하게 마른걸레로 힘을 줘서 닦아 내야 하고,  

3) 바닥은 대걸레로 빡빡 밀어야 간신히 깨끗해져. 

그 외에도 비품구비, 거울 청소 , 청소도구 세척 등 잡일이 많아. 책상에 오래 앉아있는 것만 할 줄 아는 힘없는 팔로 싱크대, 거울, 변기를 깨끗이 닦아내려고 하니 여전히 시간이 많이 걸려. 사라는 한 손에는 젖은 걸레, 다른 한 손에는 마른걸레를 쥐고 슉슉 닦아내던데 나는 젖은 걸레로 한 번 닦고 나면 아이고~ 하면서 허리 한 번 들어줘야 하니 시간이 2배는 걸리지. 


이렇게 반짝반짝 해야하는데 ㅠㅠ



월요일 아침에는 변기를 쳐다보기 전 항상 심호흡을 해.

주말 동안 파티에서 술에 취한 애들이 어떤 온갖 짓을 화장실에서 해놓았을지 두렵거든. 금요일, 토요일 밤에 파티를 가서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 

'토할거면 변기에 잘 조준해라' '학교 더럽히지말고 곧장 기숙사로 돌아가 잤으면 좋겠는데 왜 여기서 누워있을까'라고 속으로 궁시렁거려. 대망의 월요일 아침에  변기를 봤을 때 하얀 변기에 무언가 심하게 묻어있거나, 변기 뒤편으로 더러운 젖은 휴지가 잔뜩 쌓여있으면 한숨부터 나오고 한국어로 혼자 소심한 욕을 하지. 어차피 여기서 한국어 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괜찮아.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난 뒤에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면 화장실부터 보는 습관이 생겼어.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 관리를 하고 지내는 사람인지 화장실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변기 옆에 청소도구가 마련되어 있는지, 샤워부스에 물 때는 없는지. 거울은 얼마나 자국 없이 빛이 나는지. 매일 쓰는 만큼 쉽게 더러워지지만, 눈 딱 감고 방치하면 그만인 공간이니까. 그리고 누가 화장실 청소를 좋아하겠어? 그럼에도 매일 몸을 움직여 자신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기가 싸지른 똥은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치울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인 거야. 


@good housekeeping



그런 면에서 T 너는 참 성숙한 사람이지. 학교에서 가장 레이스가 많이 달린 옷을 입고 다녔던 너는, 청소 시간이 되면 민소매 원피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파란 고무장갑을 양손에 야무지게 끼고 학교 공용 화장실을 자진해서 청소하곤 했잖아. 내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학교 내 공동체 정신과 상호 간의 배려를 외칠 때 너는 묵묵히 남들이 기피하는 화장실 청소를 하는 사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몸으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어. 나에게 화장실 청소 노래를 가르쳐준 것도 너였어.

 모두가 싫어하는 변기 청소를 하면 복이 온다는 가사의 노래를 알려줬지. 

화장실 청소하면서 그 노래 부르고 싶었는데, 베트남어여서 인지 기억이 안 나더라. 


T, 나는 여전히 화장실 청소를 한다는 게 창피해. 어제는 변기 안쪽에 오물이 있어서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변기를 닦아내고 있는 데 한 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어. 

나는 파란색 고무장갑을 변기 앞에 쭈그려 앉아있었고, 

친구는 지난 주말 파티에서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지. 

 친구가 " 미안해!'라고 말하며 황급히 문을 닫고 나갔는데 나는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생각이 들더라. 


한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해서 덴마크 섬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다니. 나보다 어린 이 친구들은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는데 나는 이 덴마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청소일을 해서 식사와 잠잘 곳을 제공받지만 돈은 벌지 못해. 분명 이 섬에 왔을 때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왔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더라? 


3시쯤 일이 끝나 방에 들어오자마자 샤워부터 해. 오랜 시간 청소를 하고 나면 학교는 깨끗해지지만 내 몸은 더러워지는 느낌이거든. 샤워를 하고 나면 더러운 내 방 화장실이 보이지. 맘 같아서는 그냥 침대에 누워 쉬고 싶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서는 열심히 청소하면서 나 자신을 위한 청소는 하지 않는다는 게 억울해서 열심히 머리카락을 줍고 샤워부스를 닦고 나와. 


청소하는 스킬이 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다가 아니, 이제 그만하고 내 갈길 찾아야 하는 건가?-  하는 불안이 늘 내 몸을 휘감고 있어.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라고 너에게 물어보지 않을래. 너의 답은 뻔하니까. "말도 안 되는 짓 하지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라니까!" 하하. 정확하지? 그럼 나는 "알았어. 생각해볼게! 그 대신 변기 청소하는 노래 다시 불러줘. 내일 청소하면서 부를 거야" 라면서 떼써야지.



-구름이 선명해지고 길가에는 하얀 꽃이 피어나는 이 곳에서 늘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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