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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Apr 28. 2019

다시 서울로

서울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서울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건, 평소와 다름없던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덴마크 호밀 빵인 루그브뢰드에 잘게 자른 계란을 얹고 그 위에 마요네즈를 뿌렸다. 한 입 먹어보니 싱거웠는데 하필 소금 통은 테이블 한가운데 있어 닿지 않았다.  그날 내 옆자리에는 필립이 앉아 있었고, 나는 필립에게 소금을 건네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날은 중요한 프로젝트가 끝난 날이어서 그런지 학생들 얼굴이 평소보다 상기되어 보였다. 상기되어 ‘보였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건 내가 그들의 대화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친한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친절히 답해주겠지만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일에 지쳤있었다. 방금 왜 다들 웃은 거야? 오늘은 어떤 프로젝트를 했어?라고 묻는 건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대화 중간에 질문을 던지는 건 너와 다는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큰 에너지와 감정이 드는 일이었다. 얼굴만 봐도 이방인인게 선명했는데, 굳이 질문을 던져서 더 확인시켜주고 싶지는 않았달까. 



불 꺼진 식당


 

도대체 루그브리드는 무슨 맛으로 먹는 빵인 걸까.  날이 많이 풀렸지만 여전히 밤은 춥고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나는 찬 바닷바람이 느껴질 때마다  따듯한 국물이 먹고 싶은 한국인 인걸.  얼마 전 코펜하겐 갔을 때 사다 놓은 컵라면이 남아 있던가? 아니다, 지난번 술 마시고 아침에 해장으로 다 먹어 버렸지. 그럼 이거라도 든든히 먹어야 해. 필립에게 소금을 전달해달라고 말해야겠다. 


 하지만 필립은 뭐에 신났는지 평소보다 말이 많았고, 나는 어느 문장 사이를 끊어야 하는 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말이 끊어질 듯하다가 끊어지지 않았고 그 틈을 기다리던 사이 야속하게 조나단이 소금을 가져가 버렸다. 그렇게 소금은 나랑 더 멀어졌고, 이제 저 소금을 가지려면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겠다 생각했는데, 

순간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그만하자는 거지?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청소기와 대걸레 질로 깨끗하게 만들어 놓은 학교 계단이 밖에서 영상을 찍고 온 학생들에 의해 20초 안에 어지럽혀지는 일상이었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고  창고에서 2kg이 넘는 청소기를 다시 가져와 힘들게 말아놓은 코드를 다시 줄줄 펼쳐 콘센트에 연결했다.  청소기의 코드를 푸는 그 15초 동안 나는 도대체 이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이 자꾸만 불쑥 찾아왔다. 


 이 곳의 학생들은  자신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매일 한 발자국 씩 나아가는 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코드는 풀려있었고 코드를 콘센트에 연결하면 청소기는 성가신 소리를 맹렬히 내었다. 위이 이이이이이 잉 그 소리에 잠시 내 생각은 묻어두고 낑낑 청소기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곤 했다.

 

어떤 날은 너무 답답해서 대걸레 질을 하다가 그냥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하늘이 투명하게 맑아서 학교 앞에 한참을 서있기도 했다 그렇게 섬의 약간 짠 듯한 바람과 햇살, 매일 들어도 어떤 새인지 도통 모르겠는 새소리를 듣다 보면 그 촉감들이 너무 행복했다. 


그런 촉감들과 마음들로  버텨왔는데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아니 이제는 버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에게는 하고 싶은 게 생겼고,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덴마크 맥주 한 캔을 들고 홍상수 영화를 보았다. 홍상수 영화의 지질한 남성 캐릭터들에  질려서 안 본 지 오래되었지만  그날 밤에는 노래가 없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칸의 바닷가에서 클레어(이자벨 위페르)가 전만희(김민희)에게 묻는다. 

"한국의 좋은 점 3가지를 말해봐요"

이 장면에서 나는 잠시 정지버튼을 누르고 , 마치 내가 그 질문을 받은 것 마냥 고심했다

다양하고 건강한 음식들,  
가족을 포함해 내가 나일 수 있는 친구들,
그리고 비 오는 날 사랑했던 사람과 뛰어다녔던 경희궁의 초록빛. 

다시 play 버튼을 누르자 전만희는 말한다.

"저는 음식, 그곳에서의 기억, 그리고 친구들이 좋아요" 


@씨네 21


나는 다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뭐랄까, 이 곳에서 누군가 처음으로 나와 같은 그리움을 만난 느낌이랄까. 영화를 멈추고 방의 큰 창으로 보이는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말로 내뱉으니 더 그리워져서 먹먹했다. 




 미세먼지, 조악한 길거리의 광고판들, 어딜 가도 넘쳐나는 인간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낙인이 되어버리는 사회.  이게 내가 그곳을 도망친 이유였고 나는 여전히 그것들이 싫다. 하지만 미세먼지 만큼 덴마크의 우중충한 날씨도 싫고, 덴마크의 간판은 읽을 수 조차 없고, 이 곳에서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밤에 혼자 다니지를 못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동시에 겪어야 하는 동양 여자애다. 이 곳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토종 덴마크인(금발, 백인)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내 얼굴 자체가 낙인이다. 


어차피 덴마크도, 서울도 별로라면 나의 기억들, 음식,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서울이 낫지 않을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여기 덴마크 사람들만큼 여유도 가지고, 우울하기도 하고 적어도 굶어 죽는 걱정은 안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한국을 만드는 변화에 함께 하고 싶다. 


영원히 서울살고 싶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서울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하고 싶다. 내가 이 곳에서 느낀 삶의 태도들을 서울에서도 지켜나가면서. 투명하게 강한 마음. 그게 내가 이 곳에서 얻은 마음이니까. 그 마음을 안고 


다시 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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