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렇게 만나게 된 삿포로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흥분되고 설렌다.
아예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된 사람처럼.
지긋지긋한 월급쟁이를 탈출한 사람처럼.
한국을 아예 떠나버리기로 한 사람처럼.
내가 만든 상황 속에 나를 마음대로 던져 버릴 수 있다.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냐는 남편 질문에 '물건'보다
'특별한 기억'을 받고 싶다 했다. 그것은 여행인데.
무계획주의자에 방향감각도 없고 검색도 귀찮아하는 내가 혼자 여행을 간다면?
대충 그려봐도 예쁜 그림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남편에게 굉장히 많이 의지 하는 편이었는데집 근처 카페를 나가도 '거기가 문 닫으면 갈 곳 플랜 B,C' 까지 찾고 움직이는 남자라 그냥 믿음이 갔다.
핸드폰 요금제를 바꾸는 사소한 문제부터 자취방을 옮기는 큰 문제까지 늘 남편이 하라는 대로 선택했고 나도 그게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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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후 남은 연차 6개.
돈으로 받을까 하다 한 번만 용기 내서 떠나볼까 싶었다. 장소는 내가 좋아하는 일본으로 쉽게 정했지만
어느 '지역'을 갈 진 꽤 고민했다.
오키나와 vs 삿포로.
따뜻하고 맑은 날씨. 파- 란 바다 보고 요가나 실컷 하고 올까. 아니면 한 번도 안 가본 곳. 눈이 녹아 바닥이 찌걱찌걱해 방한화를 신고 오라는 삿포로를 갈까.
- 하다 결국 삿포로를 선택한 나는
항공권을 끊는 순간 까지도 '내가 왜 삿포로를 가려고 하나‘ 란 질문에 대답도 못하면서.
손은 여전히 카드번호를 누르고 있는.
이 어이없는 상황이 또 어이가 없고. 몰라 이것 또한 운명이겠지~ 하고 그대로 주사위를 굴려버리는 대책 없는 여자.
딱히 깊이 생각 않고 결정해 버리는 여자가 바로 나라는 거. 그리고 그 여자를 내가 너무 사랑한다는 걸 느끼며 여행은 시작 됐다.
월요일 아침 7시 40분 비행기.
남편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나를 인천 공항에 데려다주었다. 잘 다녀와 인사하고 출근하러 가는 뒷모습을 보니 '아.. 나 혼자 가는 거 맞네' 실감이 났다.
다시 와달라 할까? 지금이라도 못 가겠다 할까?
잠시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야. 이건 일본을 내 식대로 느낄 수 있는 아주 귀한 기회야'라고 얼른 생각을 바꿨다.
이번 여행에서 이걸 기대해 보는 이유는
여태껏 남편과 함께한 여행은 실수란 게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게 계획대로 착착 흘러가 마무리까지 아름다운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도 남편이 다 했기 때문에 (물론 영어로) 변수가 없었지만, 나는 한 번쯤은.
한. 번. 쯤. 은 계획이 다 뒤틀려버리는.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고 마리오가 토관으로 떨어져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 쿠파를 만나지만 , 결국 멋지게 이기고 돌아오는 그런 여행을 얼마나 바랐던가!
이젠 내가 다 부딪치면 된다.
나 혼자만이 깰 수 있는 퀘스트의 연속인 거다!
앞으로 펼쳐질 삿포로 여행을 커다란 게임판으로 만들어버리니 파묻혀 있던 모험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오예. 오히려 좋아!!
이제야 내가 왜 오키나와를 버리고 삿포로를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
성대했던 눈축제가 끝나고 질퍽한 흙 묻은 눈이 처치곤란처럼 남아 있는 더러운 보도.
여행기간 중 4일 내내 비가 온다는 걸 알면서도 선택한건 여행이지만 여행 같지 않은(?)바이브를 원했던 것 같다.
약 2시간 40분을 날아 삿포로에 도착했다.
이젠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
여기서 날 구해줄 사람은 오직 나 뿐이라고!
우선 두뇌를 일본어로 장착시키고.
안내 간판을 찬 - 찬히 살펴보니 죄다 한국어.
아..... 여기 되게 잘 돼있네요? ^-^;
(머쓱)
신치토세 공항에서 자유석 열차를 타고 삿포로 역으로 왔다. 쉬웠다.
한 40분 걸린 듯.
하늘이 파- 랳서 기분이 좋았다.
아~ 이거지.
확실히 섬나라라 그런지 우리나라 보다
진한 하늘색이 너무 좋다.
숙소로 체크인하면서 걷는 길에 만난
홋카이도청 구 본 청사.
블로그 보니 저기를 꼭 가라고 하더만.
하지만 난 안 간다.
남들 다가는 데는 왠지 가기 싫다.
멀찌감치 사진 한 장 남기는 걸로
마지막 자존심을 대신 하고.
오자마자 간 곳은 삿포로 커뮤티니 플라자.
이 도시 사람들은 평일 오전에 뭐 하는지 궁금했다.
생각보다 엄청 컸다.
9층까지 있었는데 방송국, 도서관, 극장, 문화 아트센터, 식당, 카페 등 커뮤니티 플라자와 쇼핑몰이 합쳐진 느낌. 뭔가 이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1층에서는 작은 플리마켓을 하고 있었다.
앞치마, 키링, 그릇, 쌀과자 같은 걸 팔고 있었는데
물어보면 사야 될 것 같아 구경만 했다.
홋카이도 대륙 모양의 천장 장식물이 근사했다.
홋카이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넓은 대륙에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있다던데
과연 그럴 만도 해 보였다.
삿포로가 매력 있게 다가왔던 순간.
젊은 사람들은 회사에 있을 시간이라 그런지
대부분 50~60대쯤 돼 보이는 어르신들이 1층 오픈 라이브러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공간이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고 이용자에 비해 앉을 곳이 모자라지 않을까 싶었는데 가방으로 자리 맡아두는 사람, 빈 의자에 짐 올려두고 의자 두 개 쓰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나름 질서 있게
잘 회전이 되었다.
나도 그 틈에 섞여 아이누족의 비즈공예에 대한 책을 읽었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와 오래된 전통 방식으로 만든 장신구들. 아이누족의 혼이 묻어 살아있는 목걸이.
이거야 말로 진짜 명품이 아닐까!
적어도 나에겐 이런 물건이 샤넬 에르메스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2층에 올라가 보니 서점이었다. 1층보다 깔끔한 느낌.
판매용 책이 섞여 있어 읽어도 되나 싶었는데 상관없이다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괜히 서울 가이드북이 반가워 한번 찍어보고.
인터넷으로 자료 검색도 할 수 있고 인쇄, 카피 도 가능했다. 전체적으로 신식 같아 보이는 깔끔한 내부와 이용자들의 조심스러운 행동까지 더해져 선진국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났다.
아주 오래된 신문도 다 보관한다.
저렇게 오래된 신문.. 이젠 안 보지 않을까 싶었는데
할아버지들의 인기 코너다. 엄청 많이 보셨다.
짐을 보관할 수 있는 무료 락커와 단체 회의실,
야외 리딩룸도 있었고.
아예 서점 밖에는 독서실 데스크가 진열돼 있는데
에스컬레이터 옆의 소란함에도 아랑곳않고 집중하는 학생들을 보니 마치 대학교 강의실같은 느낌도 들었다.
1시쯤 되니 50~60 대 돼 보이는 어르신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왔다.
아마 어느 층에서 무료 급식이나 할인을 제공하는 것 같았음.
혼자 여행하니 식욕도 잘 안 생기는 기분이었는데,
아침 내 굶었으니 먹어주기로.
드디어 삿포로 와서 먹는 첫끼.
스텔라 플레이스 백화점 6층 돈카츠 맛집 [와코]
1년 가까이 참아온 맥주를 입에 댄 날.
죽인다.. 진짜...
이 보리 맛이라면.... 이 청량감이라면...!
1년 넘게 참아온 내 인내의 기록이 무너진대도 좋아!ㅠ
그래 이맛이지.
이 정도는 돼야 내가 무너지지!
기꺼이 내 목에 이 참을 수 없는 맥주를 허용해버릴께!하고 정신 차려 보니
돈가스 반절이 날아가있다.
이거 누가 다 먹었노?
일본은 쌀이 진짜 맛있다.
고슬고슬한데 겉은 살짝 단단하고 씹으면 부드러운 게 입으로 술술 들어간다.
게다가 어딜 가도 사이드에 고소한 미소국이 함께 나오니.. 이건 밥을 안 먹을 수가 없잖아!
20여분의 웨이팅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배를 채웠으니 이제 쇼핑 하러.
요즘은 남자들도 귀여운 인형 한 개씩은 달고 다니던데최근 본 사람 중 키링 제일 많이 달고 다니는 사람 발견.
안 무겁나?
디즈니스토어는 언제부턴가 예전 같지 않다.
네가 변한 거니.. 내가 늙은 거니...
눈을 반짝이고 들어가도 한 바퀴 돌고나면
손에 잡히는 게 없다...
다시 돌아와 줘...
살까 말까 고민한 스누피 열쇠고리.
[오타루]가 적혀있었는데,
아마 오타루에서도 파는거겠지?
남들 다 간다는 오타루.
이번 여행에서 난 안 갈 거니까
안 간 곳을 간 척하며 사지말자 하고 나왔다.
좀 이상한 곤조가 있는 것 같다.
/
자 이제부터
내 안목의 한계라고 단정 짓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한.
이거 진짜 예요? 싶은 여자옷 디피가 이어진다.
style 01. 앙큼 폭스걸
여우꼬리를 연상케 하는 허리춤의 액세서리와
빨자마자 나락 갈 것 같은 흰 티가 인상적.
style 02. 진짜 배꼽티
갈기갈기 찢어진 청바지의 텍스쳐가 오히려 위태로워보이는 것은 왤까
탯줄을 예쁘게 끊어낸 배꼽미인들만 입을 수 있는 룩
style 03. 입금전 룩
월급 몇 달 밀린 알바생의 한이 서린 듯한 DP
style 04. 먼저헤어지자말해요룩
밭일할 때 입는 옷 같으면서도....
피크닉 갈 때 입는 옷 같으면서도..
무튼 썸남 만날 때 입고 가면 칼 정리 당하기 딱좋은룩.
뭐라도 사고 싶어 MHL블라우스를 입어봤는데
단식원 옷 입었냐 길래 그대로 내려놨다.
22만 원짜리였다.
.... 이 날 옷은 사지 않았다.
알아서 정리 돼버린 물욕의 빈 공간을 어떻게든
채우고 싶어 현지인들이 간다는 카페를 갔다.
3월 말의 삿포로는 눈이 오진 않지만 바람이 엄청 분다자비 없이 입으로 까지 들어오는 강풍이라 걷기만 해도 체력이 빠진다.
제발 이 허해진 몸과 마음을 채워주세요.
구글 평점에
"사장님이 싸가지가 없어요"라고 써있었으나.
그런 걸 걸러 낼 힘도 없었다.
이런 데 카페가 있나? 싶은 위치에 있었다.
문을 열기도 전, 일본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묵직한 재즈 음악이 어우러져 흘러 나왔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왠지 외국인이 문을 열고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그 흐름을 깰 것만 같아 잠시 망설였지만 그러기엔 내가 코코아를 너무 좋아한다.
코코아 800 엔.
조금 비쌌지만 여기는 코코아가 맛있다고 해서 일부로 찾아왔다.
초코라테, 핫초코가 아니라 [코코아]라고 쓰여있는 게맘에 들었다. 코코아는 단순히 뜨거운 초코 음료가 아니다.
코코아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것이고
많이 먹으면 엄마한테 혼나던 것이고
덜 녹은 초코가루가 바닥에 쌓여 뒤로 갈수록 더 맛있어지던 건들 수 없는 내 소중한 초코맛 추억 그자체다.
싸가지 없다던 사장님은 무표정이긴 했으나
카페 내부를 찍어도 되냐 , 유튜브에 올려도 되냐 는 나의 성가신 질문에 흔쾌히 오케이 오케이 친절하게 대답해주셨다.
표정 때문에 오해받는 게 나 뿐만은 아닌가보네
내적 동질감을 느꼈다.
전 오늘 새벽 5시부터 나와서 혼자 이 먼 삿포로 까지 왔어요. 하루 내 찬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녔는데 바람이너무 찬 거 있죠? 삿포로는 원래 이래요?
근데 제가 오늘 뭐 때문에 이렇게 돌아다녔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아무에게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속으로 그 문장들을 더듬더듬 번역만 해본다.
에이 몰라.
코코아를 마셨다.
우와 따뜻해!
찬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나가버렸던 정신이
온기와 함께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
그래.. 말할 사람이 없다는 건 정말 심심한 일이야.
외로운 일인가
첫날부터 외롭다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아 최대한 넣어두려 하지만 날이 어두워지니 계속 그 ‘외롭단’ 느낌이 비실비실 새어 나온다.
옆자리 앉은 일본 여자들의 수다를 엿들어본다.
아는 단어가 조금 들리지만 그래도 두 세 박자가 느려 버겁게 쫓아만 가다 포기하고 카페에 나오는 음악으로 귀를 옮겼다.
혼자만 듣기에는 음악이 너무 좋다.
아 이 순간 앞자리에 남편이 있더라면!
코코아에 얽힌 내 어릴 적 추억 얘기를 해줄 텐데.
이제는 일본사람들의 대화가 어느 정도 들린다며 으스대볼 텐데.
아릿해지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그래봤자 지금 나는 혼자 있다는 현실감각이 뒤섞여 몽롱해진다.
아마 지금 내 주변엔 보이지 않는 원이 둘러져있는 것 같다. 내가 나가지도 않으면서 반대로 뭐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는 그런 원.
본능적으로 이 원에서 나가야만 외롭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3월 말 삿포로의 저녁은 약간 초록빛이다.
낮에 불었던 강풍은 잠잠해졌는데
대기는 초록빛을 띠는 것 같다.
네온 간판에 초록색이 많아서인지
그냥 내 마음이 조금 차가워져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저녁은 그냥 편의점 음식을 먹기로 했다.
혼자서도 여행 잘 다니는 사람은
‘참 즐길 줄 모르네’ 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혼자 있으니 식욕도 안 생겼다.
라고 표현하기엔 사실 편의점 음식을 너무 좋아한다.
이것저것 한 봉다리 사들고 호텔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
남편이 좋아하는 어묵, 핫바 자판기를 보며
같이 있으면 이거 분명히 뽑아서 먹었을 텐데.
또 남편 생각이 났다.
익숙함을 내가 찾고 일부러 부추기는 것 같다.
횡단보도 빨간불을 멍- 하게 바라보다
'그래서. 혼자 하는 여행은 재미가 없어?'
내가 나에게 묻는다.
심심한 건 맞지만..
왠지 바로 yes라고 인정해 버리긴 싫다.
아직 하루 밖에 안 지났고......
나도 혼자인 것이 처음이라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걸 수도 있으니... 조금 더 나에게 적응의 시간을 주기로 한다.
'어.. 방금.....
내가 나에게 뭔가를 허용한 건가?'
불쑥 등장한 '자상한 나'를 만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었지만 이 생소하면서도 다정한 느낌이 웬지 좋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느낌이랄까.
하여튼 내일은 오늘 보다 좀 더 익숙해져 있기를
이 아름다운 삿포로에 내가 좀 더 뛰어들 수 있기를 바라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