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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펫크리에이터 모리 Apr 07. 2022

도그 워커

열두 번째  걸음


분홍빛 팝콘들이 막 터질 준비를 끝낸 어느 날. 오늘은 하마터면 기록적인 날이 될 뻔했지만 그렇지 못하게 된 아쉬움으로 점철된 하루이다. 나는 지금 같은 과 친구인 클로이네 집 거실에 앉아 그녀가 내미는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 사이트에 등록하면 근처에 사는 반려인들을 연결해준데.]

[정말?]

[응, 우리도 도그 워커나 한번 해볼까?]

[우리도 할 수 있어?]

[그럼! 안될 건 또 뭐야?]


클로이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는데 거침이 없다. 몇몇 친구들은 그런 그녀가 부담스럽다고 하는 반면 나는 타지 생활 선배인 그녀에게 존경심마저 느낀다. 예상치도 못한 이벤트들이 줄줄이 벌어지는 당황스럽지만 재밌는 삶을 사는 그녀의 일상은 축제이다. 오늘도 나는 그녀의 축제에 초대받았다.


각자 핸드폰을 들고 도그 워커와 반려인을 연결해주는 사이트에 접속해 가입을 한다. 생각보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많다. 곧이어 질문지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한다. 끝인가? 이제 도그 워커가 된 것인가!



그러나 마지막 관문에서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으니 축제의 막이 내린 자리에 남은 것은 한 명의 웃는 자와 한 명의 우는 자이다.


[모리, 소셜 넘버 없어?]

[... 뭐?]

[소셜 시큐리티 넘버! 그거 없으면 등록이 안되나 본데?]


 소셜 시큐리티 넘버 (Social Security Number)라고 불리는 이 번호는 사회보장 번호, 말하자면 외국인 등록증과 같은 역할을 한다. 보통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혹은 나 같은 학생의 경우 인턴을 할 경우 미국 정부로부터 이 번호를 받게 된다. 나도 나중에서야 뉴욕에서 일을 하며 이 번호를 받게 되었는데, 그전까지 나는 주민등록증도 없는 외계인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의 최근까지의 외국인 등록증은 ALIEN 어쩌고로 기재되어있었다.)


안 그래도 억울하고 씁쓸할 일들을 자주 겪게 되는 타지 생활에서 나를 만나본 적도 없는 자들에게 받은 부적격자라는 타이틀에 나는 쓸데없이 절망 섞인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 분노는 필시 그들을 향했다기보다는  반려동물과 산책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서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억울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억울함은 생각보다 긴 시간 나를 쫓아다녔다. 길거리에서 산책하는 반려견들을 볼 때마다, 한국에 두고 온 나의 네발 친구가 그리워질 때마다, 클로이가 옆집 개를 산책시켜주러 떠날 때마다 나의 부러움과 억울함은 한층 짙어졌다. 그런데 또 그들을 보며 절로 깨닫게 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그 워커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확신이었다. 


외국인 등록증도 없는 유학생이 반려견을 산책시켜주겠다며 집 문밖에 나타난다면? 개가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무슨 사고라도 나면 타지인이 이곳에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들지 않을 수 없다. 



한 번만 역지사지를 해보면 억울하던 그 무엇은 금세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나는 외계인으로써 기꺼이 도그 워커를 하면 안 된다는 거절을 당하기로 했다. 뉴욕인들의 반려 문화을 지켜 주기 위해 외계인은 일단 떠나 주기로 한 것이다. 


침공하려던 -아니, 나는 그것이 침공이 아닌 친목인 줄 알았지- 우주선이 떠난 자리에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반려 풍경만이 남았다. 뉴욕 길거리 위 네발 친구들의 평온함의 이유는 날 선 규칙들과 이를 기꺼이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애쓰지 않고 지켜지는 것들은 없다.




Instagram : @mori_park

Youtube : 펫크리에이터 모리




글/사진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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