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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을 품은, 다 부서진

#12 파묵칼레, 히에라폴리스

by 아샘


죽은 자들을 품은,
다 부서진,
저 멀리 원형극장만 덩그러니 보이는,
고원 군데군데 나무 몇 그루 서 있던,
히에라폴리스는 해가 지려는 그 순간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원래 따뜻해야 하는, 따뜻함이 그리워 남쪽으로 내려와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도 안탈리아의 아침은 바람이 불고 추웠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시데의 아침에 이어 두 번째로 추운 아침이었다. 오래 머물 수 없어 파묵칼레로 가기로 한다.


안탈리아 골목을 지나 지방도쯤 나오니 작은 장이 열렸다. 혹시 빵을 팔지는 않을까?^^ 각종 야채와 과일과 치즈와 생활용품을 파는 우리나라의 오일장 같았다. 거기서 화덕에 구운 빵을 만났다. 즐거운 마음에 큼지막한 터키 빵 세 개를 30리라에 샀다. 이어, 오렌지도 1kg 정도 사고. 잠시 뒤 주유소 편의점에서 우유와 아이린과 커피 한 잔을 더하니 더할 나위 없는 아침식사가 되었다.


파묵칼레로 가는 길 역시 눈이다. 커다란 산맥이 멀리 보이고 사방이 고원지역인 것 같은데 모두 눈 속에 잠겼다. 터키에서 나는 추위와 싸우며 눈을 실컷 보는 중이다.


파묵칼레는 이미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 많이 알려진 곳이다. 석회암층이 넓게 펼쳐져서 하얀 목화솜이란 뜻의 지역. 예전만큼 온천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어,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또, 안탈리아보다 기온이 낮아 추울 걸 대비하면서 그저 유명하니 하루만이라도 들렀다 가자라는 마음이었다.






히에라폴리스


사실, 파묵칼레에 온 이유는 히에라폴리스를 걷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히에라폴리스는 그런 나의 바람을 200프로 만족시켜 주었다. 여름이라면 혹시 덥고 강렬한 태양 때문에 힘들었을지 모를 오늘의 히에라폴리스는 겨울이기에 햇볕을 흠뻑 받고 산책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그동안 시데, 아스펜도스, 페르게의 고대도시를 다녀봤지만 이토록 완벽하게 황량하고 다 부서진 고대도시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토록 커다란 규모의 고대도시도 없었던 듯싶었다.


사우스게이트에서 뮤지엄 카드를 보여주고 들어가 마주한 히에라폴리스의 지도를 보고 나름 기대를 했었다. 아, 게이트를 지나면 원형극장과 대목욕장이 보일 것이고, 아폴론 신전을 지나 아고라를 마주하고 이어 북문까지 유적들이 즐비하겠지....


하지만 지진에 의해 다 부서진 히에라폴리스는 처연할 정도의 폐허였다.



파묵칼레 석회층


짐나지움이었다는 잔해를 지나 파묵칼레 석회층을 먼저 방문했다. 따뜻한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조금 걸어보았다. 이런 온천수가 나오는 곳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얼마나 충만하게 이 물을 만끽했을까? 온천수가 많이 나오지 않아 석회층만 보인다는 파묵칼레에 오늘은 눈이 덮여 새하얗다. 족욕을 하는 곳 몇몇 석회층만이 하늘색 물이 차 있다.

지금은 관광지인 이곳은 로마 시대 때는 치료와 휴식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황제들과 고관들이 이곳을 찾아 하얀 결정체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했다고. 우리들도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앉아 쉬었다. 그 시대 황제들처럼 말이다.


히에라폴리스 박물관


건너편에는 대 목욕장을 리모델링한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히에라폴리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해 둔 곳이다. 이미 여러 고대 유적지와 안탈리아 박물관에서 화려하고 다양한 유물을 보고 온 터라 모두가 익숙한 것들이었고, 페르게 유적에 비하면 소박했다. 목욕탕 건물 또한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두 세 곳 정도를 빼고는 주변 건물이 모두 부서져 있었다.



안티크 풀


뮤지엄을 지나 멀리 원형극장으로 가는 길에 안티크 풀이 있었다. 일명, 클레오파트라 풀이라고 불린단다. 온천 안에도 돌로 된 유적이 잠겨 있었다. 수영복을 챙겨 오지 못하기도 했지만, 히에라폴리스 다른 유적을 보는 것이 더 간절했기에 풀 장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원형극장


원형극장은 그나마 복원이 잘 되어 있었다. 너무나 황량하고 쓸쓸하다 여겼는데, 이렇게 앉아서 돌아볼 수 있는 유적이 있어 좋았다. 이미 고대에도 두세 번에 걸쳐 원형극장은 증축이 되었다 한다. 그곳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음악도 들었다. 이상하게 원형극장에 가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황량한 메인 게이트


님파에움과 아폴론 신전은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높은 산이 있었고, 저 멀리 마을이 보이는 이곳은 고원이었다. 고대에는 이곳에 도시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치료에 좋은 온천수까지 가진 파묵칼레. 이곳에 세워진 히에라폴리스는 그 이름(히에라는 성스럽다는 뜻) 만큼이나 신성해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그래서 황제나 고위직이나 휴가차 올 수 있었던, 세상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였을 지도 모른다.


고원을 산책했다. 북문 쪽으로 걸었다. 북문 가까이 당시의 주요 도로로 여겨지는 건물과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상상한다. 메인 게이트(프론티누스 게이트)도 그나마 복원이 좀 되었다. 게이트 중간쯤 로만 문자가 길게 새겨져 있었는데, 라틴어를 안다면 대략이라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을 해본다. 메인 게이트를 지나 마차들이 이 도시를 들락거리고 그 옆으로 지붕이 있는 거리로는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 거리 뒤에는 공동화장실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현대화된 도시. 바실리카 건물과 님파에움 분수대도 멋지게 거리를 장식했을 것이다.


네크로폴리스


북문이 보이고, 그 뒤로는 수많은 석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네크로폴리스(그리스어로 사자의 도시라고 한단다)라고 불리는 곳이다. 관들이 넘쳤다. 미처 다 둘러볼 수도 없을 만큼 넓은 공간에 그저 석관만 가득이다. 오래전 로마의 성스러운 곳을 찾아온 사람들, 아나톨리아 반도의 어느 이름 모를 곳에 살던 사람들은 소식을 듣고 이곳 파묵칼레로 찾아왔을 것이다. 온천수로 아픈 몸을 고치려 했던 그들이 아마도 이곳에 묻혀 있을 것이다.


남문부터 북문, 네크로폴리스까지 길고 광활했던 히에라폴리스를 거의 다 둘러보았다. 서쪽으로 해가 지려 했다. 저 멀리 원형극장만 덩그러니 보이는, 다 부서진, 고원 군데군데 나무 몇 그루 서 있던 히에라폴리스는 해가 지려는 그 순간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이 순간 이곳에 서 있어서 감사했다.






친절한 숙소와 식사




구글맵이 안내하는 별점 5점짜리 the cotton house hotel은 꼭 소개하고 싶다. 우선, 튀르키예에 와서 가장 완벽한 깔끔함과 풍부한 온수 그리고 더할 나위 없는 따뜻한 난방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시데와 안탈리아에서는 온수 샤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올드타운에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이니 만큼 완벽한 온수는 양보해야만 했다. 이곳 파묵칼레의 숙소는 참으로 만족스럽다.

두 번째로는 주인아저씨와 그 아들 모두 너무나 친절하다는 것이다. 약간의 디스카운트를 해 준 덕분에 320리라에 묵을 수 있었는데, 주차할 공간도 넉넉하고 룸 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전기주전자 및 글라스까지 놓여있었다. 내일 아침엔 조식을 룸서비스해 준단다. 기대된다. 저녁때 들어오니, 따뜻한 차이를 대접해 준다. 이런 곳은 처음이다.


파묵칼레를 입장할 때는 비교적 따뜻했지만, 석양이 질 무렵 나오려니 너무나 추웠다. 급히 또 구글맵에서 찾은 별점 5점짜리 식당을 찾아갔다. 이곳도 추천하고 싶다. Hiera Coffee & Tea House.

야외용 식탁은 춥고 실내에는 테이블이 세 개 밖에 없었다. 이미 꽉 차 있었는데, 다행히 식탁 하나가 빌 모양이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식탁을 깔끔이 세팅한 후 앉으라고 한다.

앉자마자 물을 컵에 따르고, 차이를 내준다. 마침 추웠는데 따뜻한 차이 한 잔이 얼마나 반갑던지. 앉자마자 서비스를 해 주었으니, 비용을 지불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에서는 별도로 차이 값을 내야 했다.) 메뉴판을 주고 충분하게 선택할 시간을 주었다. 닭날개구이와 아다나 케밥을 주문했다. 직접 굽는 모습이 보인다. 식사 테이블에서 주방이 훤히 보여서 우리의 음식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포크와 반찬류를 서빙해 주더니 맵고 안 맵고를 설명해 준다. 이어 약 10여 가지의 소스류를 테이블 옆에 세팅하고 올리브유와 샐러드 소스를 놓아주더니 직접 만든 거라고 안내해 준다. 그리고 식사가 나왔다. 큰 접시 위에 샐러드용 야채와 닭날개구이와 밥과 감자튀김과 피망처럼 큰 고추 구이, 그리고 그 위에 납작한 에크멕 두 조각이 얹혀 있었다. 사이드 접시까지 대접해 주니 완벽하다. 푸짐하게 먹고 나니 후식으로 커피와 티, 애플티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터키식 커피를 주문했다. 이어 커피와 함께 디저트용 빵과 작은 초콜릿까지. 서빙할 때마다 친절한 설명도 마음에 들었다. 아이린을 함께 주문했더니, 식사 전에 줄까? 식사와 함께 줄까? 커피는 설탕을 넣어줄까? 말까? 등 음식을 서빙할 때마다 손님의 취향을 물어주는 것에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올 때 남은 물병까지 가져가라 한다. 무려 1.5리터짜리 물병이었는데....


구글맵에 소개된 두 곳에 대해 나 또한 리뷰를 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받은 친절에 보답하고 싶었다.



해가 질 무렵의 파묵칼레를 사진에 담고,

가슴에는 히에라폴리스를 담았다.



2022년 1월 27일 파묵칼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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