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쉼표, 쿠샤다스, 부르사
차를 빌려 다니니 너무 편했다. 숨겨진 유적지를 다니기에도 좋고, 한 번 가본 곳에 문득 다시 한번 가볼 수도 있고 좀 쉬었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떠나고 싶을 때 출발하면 되니 여행 일정이 좀 너그러운 것 같다.
고속도로 휴게소 레스토랑에서 양고기 케밥을 점심으로 먹게 될 줄이야. 스타벅스 커피도 한잔 마셨다.
2022년 2월 1일은 튀르키예에서 40년 만에 만난 파트너의 친구와 함께 온종일 안탈리아를 돌아다녔다. 페르게를 다시 돌아보고 안탈리아 올드타운을 다시 걸었다. 40년간 쌓였던 이야기는 하루를 다 보내도 모자를 지경이었고, 유적지를 돌아보는 중에도, 밥을 먹으면서도 커피를 마시면서도 계속되었다. 여행 중 잠시 쉼표를 가진 것 같다.
여행 자체가 일상 속 쉼표라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 우리의 렌터카 여행 내부를 들여다보면 치열하게 공부하는 또 다른 일상이기도 하다. 하루 일정을 짜고 어디서 무엇을 몇 시에 먹을지를 정하는 것부터 방문할 곳의 비용 대비 효과는 어느 정도일까를 고민하고 어떤 동선으로 돌아다닐지를 예측하는 등 매 순간 최고의 판단력을 동원해야 한다. 더불어 좋은 순간이 나오면 바로 카메라를 켠다.
단 한 명의 파트너와의 여행이라도 모든 순간 모든 결정을 함께 하는 과정도 그렇다. 서로의 호기심과 서로의 체력을 점검하고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정도를 절묘하게 맞추어 그때그때 결정하고 그때그때 양보하는 일련의 과정은 또 다른 공부하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마치 여행이 쉼표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새로운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새로움은 반복되는 일상에 큰 쾌감이 되고 쉼표 같은 느낌을 준다. 쉼표는 시작이다. 다시 시작하게 하는 에너지를 주는 것이 쉼표다. 세상은 참 넓고 경험해 볼 만한 곳이라는 새로운 시작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안탈리아에서의 시간은 쉼표의 순간 속 또 하나의 쉼표였다. 누군가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 일로 새로운 시작의 기운을 받았다. 반갑고 귀한 인연이었다.
2월 2일 어제 우리는 쿠샤다스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거의 6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이동의 날이라고 보아야 한다.
도로변 길가의 과일 좌판에서 오렌지를 사고 휴게소에서 차를 한잔씩 한다. 이번에는 좀 작은 오렌지를 샀다. 우리나라의 귤 만한 크기여서 까먹기 좋은데, 맛은 오렌지였다. 조금만 더 살면 오렌지를 잘 고를 줄 알 것 같다. 덤으로 큰 오렌지 두 개를 더 준다. 식당에서 차를 마시고 나오는데 갑자기 주인이 맛을 보라며 작은 오렌지 몇 개를 또 넣어준다. 오렌지 풍년이다. 이러니 튀르키예 사람들을 안 좋아할 수가 없다. 친절은 언제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튀르키예 도로에는 주유소가 적절한 거리에 있다. 국도의 경우에는 너무 많을 정도다. 물론 눈 덮인 산악지형에서는 거의 없어서 주유를 미리 하지 않으면 고생할 뻔하기도 했지만. 주유소마다 편의점을 함께 운영했고 안에는 화장실이 있다. 덕분에 우리는 화장실 걱정 없이 굶을 일 없이 잘 다닐 수 있었다. 물론 가격은 좀 비싼 편이다. 커피는 자판기 네스카페를 주로 파는데 10-15리라 정도 된다. 때로 식당과 슈퍼를 함께 운영하는 주유소도 있다. 이곳에서는 식사를 할 수 있고 필요한 물건도 살 수 있다. 국도 식당의 맛은 복불복이었는데 어느 정도 식당의 사정을 파악한 후엔 주로 렌틸 수프와 차이를 먹었고 수프를 시키면 빵이 함께 나왔기 때문에 끼니를 해결하기 좋았다.
차를 빌려 다니니 너무 편했다. 숨겨진 유적지를 다니기에도 좋고, 한 번 가본 곳에 문득 다시 한번 가볼 수도 있고 좀 쉬었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떠나고 싶을 때 출발하면 되니 여행 일정이 좀 너그러운 것 같다. 마음은 젊어도 몸이 잘 따라와 주지 않는 50대와 60대의 여행이니 이 정도 호사를 좀 누려도 되지 않을까 변명해 본다.
예쁜 항구도시였다. 어제는 밤에 도착해 예약해 둔 호텔에 짐을 풀고 근처 시내에 나가 저녁만 사 먹고 바로 쉬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비가 세차게 오더니 우박이 내렸다. 진기한 현상인지 식당 안 모든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며 걱정을 했다. 다행히 잠시 뒤 그쳤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두운 골목을 걸어 겨우 호텔에 도착한 후에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밤 새 천둥 번개가 쳐서 잠을 설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아침 쿠샤다스는 전날의 공포스러운 비바람을 이겨내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름과 실 빛 햇살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풍경은 어제의 두려움을 싹 씻겨주었고, 룸서비스로 배달된 정갈한 조식을 마주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쿠샤다스의 작은 섬, 귀베르진 이란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비둘기 섬이라고 한단다. 쿠샤다스란 이 예쁜 이름도 새들의 섬이란 뜻이란다. 무려 16세기의 성채라고 하는 성벽이 섬을 감싸고 있었다. 섬 안의 산책로는 아기자기 예쁘다. 해상전쟁 승리의 주역, 바르바로사 하이렛딘 파샤의 동상도 있다. 군데군데 벤치와 작은 정원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알싸한 공기와 바다와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주니 섬 산책이 환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섬은 아주 작았다. 걸어서 10-20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다. 그 작은 섬은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 한 시간을 머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섬의 역사, 섬에서 나는 나무들, 이 섬을 본거지로 삼아 기독교 세력과 오스만 세력 간의 해상전쟁을 벌였던 이야기들을 다 담아내려고 애쓴 흔적들이 그 작은 섬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근처, 레이디스 비치에도 가 보기로 했다. 그냥 비치 그 자체였다. 겨울이어서 그저 쓸쓸한…. 카페에서 진한 터키쉬 커피를 마시며 비치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새들의 도시를 떠났다.
부르사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나 있다. 스타벅스 표지판이 보이는 휴게소가 나와 들어가기로 했다. 근사한 레스토랑과 그 옆에는 스타벅스와 또 저 끝에는 버거킹까지…. 와우, 대단한 휴게소다. 휴게소 레스토랑에서 양고기 케밥을 점심으로 먹게 될 줄이야! 아이란을 담은 그릇도 근사했다. 여느 고급 레스토랑 못지않은 분위기와 서비스가 이어졌다. 물론 가격도 싸지는 않았다.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도 한 잔 마셨다. 이스탄불까지 이어지는 이 고속도로는 이렇게 화려한 가게들이 여행객들을 맞이했다. 튀르키예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사람을 푹 쉬게 만든다. 밥도 천천히 먹고 커피도 여유롭게 마시고 싶어 진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오니, 근처 유명한 울루자미로 막 예배를 드리려는 이슬람 신자들이 가득하다. 신성한 예배가 잘 진행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부르사에서 유명한 이스켄데르 케밥과 라흐마준을 먹는다. 이젠 메뉴 주문이 익숙하다. 작고 맛있는 피자의 한 종류인 라흐마준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밤 산책을 한다. 걷다 보니 웬 푸른빛 피라미드 건물이 보였고, 그곳 1층이 바로 스타벅스였다. 내부로 들어가니 쇼핑센터였다. 들어온 김에 둘러보기로 했다. 꽤나 고급스러운 매장들이 즐비했고, 때문에 이 건물 출입엔 HES 코드가 필요했다. 경비원 같은 분이 한 명 한 명 검사하고 있었다. 아이쇼핑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 먹는다. 화려한 고성의 야경이 펼쳐지고 트램이 달리고 사람들이 가득한 밤이다. 비 내리는 부르사는 대도시였다.
내일은 이 분위기 넘치는 부르사를 돌아봐야겠다.
2022년 2월 3일, 부르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