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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터카 여행 시작 그리고 고립

#3 고속도로위에서 하룻밤

by 아샘

'콩'을 통해 음악을 듣고 '팟빵'을 통해 라디오도 들을 수 있다.
휴게소에서 과자와 자판기 커피를 사서 마셨다.
차 안은 따뜻하다. 화장실도 가깝다.
캐리어에서 옷을 더 꺼내 추위를 이겨낼 수 있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겠지 라는 희망이 생긴다.





이스탄불의 첫 아침


지인이 차려주신 아침은 4가지 종류의 치즈, 4가지 종류의 터키 빵, 라벤더 잼과 딸기잼, 토마토와 루꼴라 올리브유와 레몬즙의 샐러드, 짜이와 생즙 오렌지주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과하도록 넘치는 식사였다.

완벽한 터키식 아침식사

이것이 오늘의 마지막 한 끼였음을,

더 이상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없었음을,

아니 아사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낄 줄을,

이 때는 몰랐다.










렌터카 빌리고 여행 시작


사비하괵첸 공항으로 예약해둔 자동차를 빌리기 위해 탁심까지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이스탄불의 교통혼잡 속을 달려주신 지인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공항버스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며 이스탄불의 보슬비 촉촉한 풍경을 볼 때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본 여행의 시작이다!



렌터카 빌리기


이미 한국에서 예약해 둔 바우처를 들고 우선 공항 내 1층에 있는 렌터카 사무실에 가서 확인을 받아야 한다.

이후 지하 3층 렌터카 주차장에 가서 차를 건네받으면 된다. 예약해 둔 차가 아닌 다른 차를 건네준다. 차 운전 시 필요한 장치들을 대략 점검하고 그냥 무심히 블루투스 어떻게 연결하는지 물어보니 언어를 영어로 선택해 주고 연결해 주었다. 내 폰 안에 음악도 별로 없는데 뭐 도움이 되겠나 싶었지만, 이게 나중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 지를 이 때는 몰랐다.


기분 좋은 출발


우리의 첫 여행지, 사프란볼루에 눈이 온다는 날씨를 체크해 보았고 눈이 오긴 했지만, 떠날 때의 고속도로 상황은 너무 멀쩡했고, 이왕 왔으니 원래의 계획대로 가기로 했다.

터키 고속도로를 달리다


차를 빌리고 톨게이트를 지날 때 필요한 하이패스가 없는 줄 알고 차량 안을 찍어서 지인분께 카톡으로 보내 문의하니 앞 유리에 붙어있는 스티커가 그 역할을 한단다. HGS라고 쓰여있고 그 밑에 바코드가 찍힌 스티커 한 장이 우리나라의 하이패스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도 이런 간단한 스티커가 하이패스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 번째 휴게소에서 주유를 하고 (꽉 채우길 얼마나 잘했는지) 커피 한잔 마시고 또 기분 좋게 출발했다. 파트너는 타국에서 수동으로 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이 스스로 대견한 듯했다.








폭설


눈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눈발이 세졌다. 구글 내비게이션으로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30분!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사프란볼루에도 이렇게 눈이 내리는구나.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냥 앙카라로 갈까?' 사프란에는 내일까지 눈이 오고 앙카라는 춥지만 내일은 맑았다. 두 번째 휴게소에서 화장실만 들르고 나오며 우리는 앙카라로 가기로 하고 구글 여정을 바꿨다. 아직 사프란과 앙카라로 나뉘는 갈림길도 나오기 전이었는데 눈이 심상치가 않았고 이어 지체가 시작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교통사고가 일어난 줄 알았다.


그 상황은 4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렌터카를 확인하고 나올 때 편의점 들러 과자 두 개와 음료수 두 개를 사 왔는데 이미 과자는 반 개만, 음료는 물만 조금 남은 상태로 거의 세 시간 가까이 갇혀 있으려니 긴장이 몰려왔다. 화장실도 못 가고, 이미 저녁시간인데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 반 개 남은 과자를 아껴먹기로 했다.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다. 차량 지체로 꼼짝도 못 하는 사이 눈은 폭설로 변했고, 날은 추워서 도로 위 눈이 얼기 시작했다. 드디어 차량이 미끌거리기 시작했다. 타이어의 문제인지 수동기어 사용의 미숙함 때문인지 계속 차가 미끌거렸다. 잘못되면 안 될 것 같아 비상등을 켜고 운전하지 않고 그냥 서 있기로 했다. 이때부터 약간의 공포가 밀려왔다.

할 수 없이 지인에게 카톡으로 상황을 전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위안을 받는다.

'고속도로니까 곧 제설을 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혹시 모르니 대사관에 전화하면 제설이라도 빨리 해 주지 않을까요?'

혹시 몰라 한국대사관 긴급 콜로 연락을 해봤다.

'견인차를 보내달라는 건가요?'

'아니요. 그럴 것 까지는 없고요. 제설이 얼른 되었으면 좋겠어요. 일단, 기다려 볼게요.'

'알겠습니다. 저희들도 고속도로 상황을 체크해 볼게요.'


고속도로는 지체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밤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눈 속에 고립되어 있다


드디어 제설차가 3-4대 지나가고 경찰차가 지나간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히터가 안 나오고 찬바람이 들어온다. 추운 건 고사하고 앞유리가 얼기 시작하니 앞도 안 보인다. 너무 당황해서 이것저것 만져보다가 다시 시동을 켜니 다행히 히터가 나온다. 히터가 나오니 살 것 같다. 기름도 넉넉해서 다행이다.


잠시 뒤 차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우린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관이 와서 문을 열라 하고는 제설이 된 옆 차선으로 가라고 소리를 친다. 차가 계속 미끄러져서 운전을 못하겠다고, 도와달라고 영어가 안 통하는 경찰관에게 손짓 발짓을 했다. 경찰관은 보다 못해 우리 보러 나오라 하고, 직접 운전을 해서 제설이 된 차선으로 옮겨준다. 미끄러지는데도 과감하게 운전을 해서 제설된 맨 끝 차선으로 차를 이동시켜 주었다. 얼마나 고맙던지.


그때부터 천천히 이동했다. 아직도 앙카라까지는 많이 남았다. 휴게소가 보였다. 차들이 다들 그리로 들어간다. 대부분 주유를 위해서였다. 우리도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이 급했다. 휴게소에는 차들이 가득해서 마땅히 주차할 곳도 없었다. 잠시 기다리다가 차들이 이동하는 틈을 타 휴게소 편의점 아래쪽 주차구역에 안전하게 차를 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휴게소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차 안에 있다.


블루투스를 연결하길 잘했다. '콩'을 통해 KBS 클래식 FM 음악을 듣고 팟빵을 통해 라디오도 들을 수 있다. 휴게소에서 과자와 자판기 커피를 사마셨다. 차 안은 따뜻하다. 화장실도 가깝다. 캐리어에서 옷을 더 꺼내 추위를 이겨낼 수 있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겠지 라는 희망이 생긴다.

블루투스로 휴대폰에 연결해 음악을 들었다


튀르키예 고속도로 휴게소의 언터치 시설들


휴게소를 들어갈 때 문 손잡이를 잡을 일이 없다. 주로 자동문. 아니면 문 옆의 센서에 손을 갖다 대기만 하면 열린다. 이윽고 전등이 켜진다. 휴게실 화장실은 특히 다 그렇다.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 문도 언터치. 손 씻는 수돗물도 세제가 나오는 곳도 마찬가지다. 어디 만질 수 있는 곳이 없어 안전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눈이 가득한 상황. 작은 주유소 겸 휴게소의 화장실은 생각보다 참 깔끔하고 냄새도 안 난다. 청결한 튀르키예 사람들이다.


새벽에는 여유를 찾다.


우리뿐 아니라 벌써 십여 대의 차 속에서 사람들이 자고 있다. 한쪽에선 눈을 깨는 소리도 들리고 이따금씩 차량 경적소리도 들리더니 새벽녘 지금은 고요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여유롭다. 체인을 사서 타이어에 끼고 출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휴게소에서는 차를 마시고 소소한 과자를 먹으며 쉰다.


대한민국이라면 좀 더 제설이 일찍 이뤄지고 벌써 차량이 이동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비교를 한다. 하지만 이곳은 튀르키예다. 대륙 같은 광활한 땅, 한국의 4-5배나 긴 고속도로의 제설을 원활히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일 것이란 결론에 이르니 이 폭설은 그저 견뎌내야 할 자연재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부디, 이곳에서 벗어난 글을 쓰게 되길 기도한다.



2022년 1월 18일, 이스탄불-앙카라 고속도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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