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을 자연스럽게

#5일 차, 천천히 끈기 있게

by 아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닐까?
함께 걷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길을 나는 과연 행복하게 걸을 수 있을까?





이동 : Pamplona -- Puente La Reina



이른 아침, 모니카를 먼저 찾아갔다.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둘러보니, 세탁실 앞에 있는 것이 보였다.


찾아가서 인사를 하니, 오늘도 좀 늦게 출발할 예정이고 아주 조금만 걸을 예정이란다.

그렇게 모니카는 천천히 산티아고를 느낄 것 같다.

노란 리본을 주며, 힘내라고 격려를 해 주었다.

모니카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했다.


산티아고를 걸으며 만나는 친구들에게 줄 선물은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노란 리본이었다.

일단 무겁지 않은 것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고민을 했었는데, 불현듯 노란 리본이 생각났다.


잔과 캐시 그리고 홍콩친구에게 노란 리본을 주면서 잠깐 설명을 해 주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참으로 슬픈 사건이 있었다.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탄 배가 바다에서 전복되어 참으로 많은 학생들이 죽었다.
선장은 본연의 임무를 하지 않고 도망갔다.
이 사건은 사실 정부의 책임이 크다.
다 낡은 배를 다시 쓸 수 있도록 법을 고친 것이나,
화물을 더 많이 실어도 제재하지 않은 정부의 문제다.
희생자 부모님들과 국민들은 정부에게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노란 리본을 만들어 우리의 뜻을 알리고 있다.
노란 리본은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소망의 의미 그리고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신에게도 소망과 평화가 함께 하길 빈다.”


영어로 말하기 어렵지만 조심스럽게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해주면 다들 고마워했다.


어깨가 축 쳐진 모니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나니, 한결 편했다.

아마도 모니카는 이후 못 만날 것이다.

함께 걸었더라도 어느 지점에선가 우린 헤어졌을 것이다.




각자의 페이스가 있어서, 산티아고 도보 길에서는 만나다가 헤어지곤 한다.

그렇게 헤어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곳이 그곳 산티아고이기도 하다.


길이란 그런 것이다.

혼자 걷고, 그러다 동행을 만나고, 함께 걷다가 또 따로 걷고…….


아마도 난 이 길 위에서 그러한 만남과 인연을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캐시와 잔과 함께, 발걸음도 가볍게 도보를 시작했다.

다시 새 출발하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어깨는 많이 아팠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견뎌내기가 어렵지 않았고, 점점 걷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같고,

내 얼굴에는 여유가 조금씩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잔이 놀리기 시작한다.

"민은 매일매일 빨라져요~^^"




사실 이 길을 걷기 전 나는 까미노를 계획하며, 길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거창한 생각을 잠깐 하긴 했다.


하지만, 이내 까미노를 끝까지 걸을 수 있을지,

다 걷지 못할지 장담할 수는 없었기에

까미노에서 뭔가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걷다 보면 뭔가 거창한 걸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품고 까미노를 시작했었다.


나는 지금,

그 모든 것이 욕심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중이다.

오직 걷는 일만, 집중하고 있다.

아픈 어깨를 보듬으며, 함께 걷는 친구들과 보조를 맞추어가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에만 온 관심이 가 있다.




한 30분쯤 걸으면 슬슬 다음 마을이 생각나고,

1시간쯤 걸으면 다음 마을까지 얼마나 걸어야 하나, km를 가늠해 보게 되고,

그러다 어깨가 더 많이 아프면, 두 손으로 배낭의 어깨끈을 잡아 올려 어깨사이에 숨을 불어넣어 준다.

그렇게 하면서 2-3시간쯤 걸어가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이면 정말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니 그저, 걷는 일에만 집중하자고,

다른 욕심은 절대 부리지 말자고 내게 타이른다.


하지만, 친구들과의 만남은 늘 운명처럼 곁에 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을 만난다는 것과 같은 건 아닐까?

함께 걷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길을 나는 과연 행복하게 걸을 수 있을까?

어쩐지 나는 지금 같이 걷고 있는 잔과 캐시와 끝까지 같이 걸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많은 날들을 걸은 건 아니지만,

함께여서 가능한 일들이 많았다.

혼자였다면 아마도 좀 더 천천히 그리고 좀 더 많이 쉬었을 것이다.

함께 걷다 보니 좀 힘들어도 참게 된다.


P20150825_114050709_D996DB38-E90B-402A-B83B-A34D8A997B4F.JPG


잔이 잘 걷는다. 젊으니까 당연히…….

그런데 우리와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이니,

그것이 미안해서 힘을 내게 된다.


캐시 역시 노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씩씩하다.

일주일에 3-4번씩 운동을 한다더니 정말 기운이 좋다.

나도 까미노를 위해 열심히 운동을 했는데 잔과 캐시는 정말 씩씩하고 빠르게 그리고 힘차게 걷는다.


대신 나는 걸으면서 나의 장점을 개발한다. 끈기를 …….

천천히 걷지만 끝까지 걷는다.


캐시와 잔이 있어서 가능한 일들이다.

함께 걷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저녁에 잔과 캐시와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맥주 1잔을 먹고 필그림 메뉴를 시켜 먹었다.


일본친구 유리를 우연히 만나 함께 식사를 했다.

이미 론세스바예스에서 우리는 아시아인라며 인사를 나누었던 그녀.


여전히 유리의 영어는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 힘들지만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유리는 일본인인데, 지금은 런던에서 살고 있다.

그녀가 런던에서 산 지도 벌써 20여 년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유리의 말투는 일본어 억양에 영국식 영어발음과 단어들이 섞여있는데,

말이 빨라 잔과 캐시의 영어보다 더 알아듣기가 힘들다.

하지만 왠지 서로에게 친근감이 자꾸 생겨나는 것 같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지만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며 함께 활짝 웃었다.


숙소로 돌아와 한국인 커플을 만났다

아일랜드에서 공부하는 여자 친구와 스페인에서 요리를 공부하는 남자친구였다.

여자는 영어를 꽤 하고,

남자는 스페인어를 꽤 하고.

환상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과 또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하루하루,

사람 만나는 것이 신나고 재미있다.




2015년 8월 25일, 푸엔테라레이나에서





이전 07화그립다면, 쉬어 가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