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가 선물인 이유

#15일 차 까미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배운다

by 아샘
사실, 그 젊은이는 어제부터 눈에 띄었다.
어쩌다 보니 줄곧 우리 일행과 속도가 비슷했기 때문에
자주 눈인사를 나누곤 했다.
슬로바키아에서 왔다고 했다.



이동 : Hornillos del Camino --> Castrojeriz







점점 걷는 것이 편해지고 있다.

어깨가 아플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안 후에는 그렇게 자주 1분 휴식을 하고 있다.


요즘 캐시와 잔과 나는 따로 걷고 또 같이 만난다.

지난번 로그로뇨를 지나고 나서부터 잔은 자기가 따로 혼자 걷게 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워낙 잘 걷고 걸음이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러기로 했다. 이후 캐시도, 나도 걸을 땐 각자 걷는 편이다. 잔은 먼저 훌쩍 걷다가도 이내 어느 지점에서는 꼭 우리들을 기다려준다.


뭔가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또 같이 걷다가, 속도에 차이가 생기면 또 먼저 앞서 걷는다.

하지만 그렇게 따로 걸어도 어느 곳에선가 우리 두 여자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우리는 따로 걸어도 함께 간식을 먹고, 함께 점심을 먹는다.


캐시는 처음보다 속도가 줄었다. 요즘은 거의 내가 캐시보다 더 빨리 걷는 편이다.




어제부터 여기저기 낯선 얼굴이 있었다.

우리들은 오며 가며 낯선 얼굴들과 눈인사를 하기도 하고, 어쩌다 함께 걷다 보면 또 어느 나라출신인지 왜 이곳 까미노에 오게 되었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을 이야기하게 된다.

오늘은 도미니크라는 친구를 만났다.


어깨를 풀어줄 겸 잠시 혼자 쉬었다가, 뒤를 돌아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서 이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오는 남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고, 그의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리고 인사를 나누었다.


사실, 그 젊은이는 어제부터 눈에 띄었다. 어쩌다 보니 줄곧 우리 일행과 속도가 비슷했기 때문에 자주 눈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슬로바키아에서 왔다고 했다. 잠시 간단한 이야기만 나누고 헤어졌는데 또 만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함께 걸었다.

도미니크는 독일어는 좀 공부해서 제법 하는데, 영어가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말하는 나와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단어와 단어를 열거하면서, 나는 그의 단어를 문장으로 만들어 다시 되물어가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것들을 공유하게 되었고, 그렇게 친해졌고, 나중엔 우리 일행과 함께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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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마치고 직업을 구하고 있는 도미니크는 이곳에서 쉼을 위한 시간을 갖고 자신을 돌아보고 싶다고 했다. 마침 여자 친구가 스페인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도보가 끝난 후에는 여자 친구를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다고 했다.


또 조금 걷다가 줄리아(실제 발음은 율리아)란 젊은 처녀를 만났다. 몸집이 제법 큰 젊은 여자였는데, 독일에서 왔단다. 호텔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그만두게 되어 이렇게 오게 되었다고. 이 친구와는 잠시 동안 함께 걷다가 이내 각자 걷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줄리아와는 또다시 만난다.^^)




이렇게 까미노에서는 오며 가며 친구들을 만난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늘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우리가 보통 쉬는 곳에서 다른 이들도 쉬기 때문에 그렇게 쉬다 보면 자주 보는 얼굴들이 있고, 그렇게 만난 우리들은 보통 Buen Camino를 외치고, 다음마을에서 또 보자며 헤어지곤 한다.


까미노에는 나이 드신 서양 사람들이 꽤 많은 편이다. 내 또래 나이부터 65세 이상의 어른들이 많았다. 대부분 이들은 은퇴하고 오신 분들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보통 10일에서 20일 사이 휴가를 이용해서 오는 분들이다. 이들 은퇴하고 오시는 분들은 그동안 수고한 자신을 위한 선물로 이 길을 걷는다고 한다.


한 달을 꼬박 걷는 것을 자신에 대한 선물로 생각한다는 그 마음부터가 신선했다.

내가 이곳을 오려고 했을 때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그중 50%는 이렇게 물었다.

'무슨 일 있냐?'

'무슨 걱정이라도 있냐?'

'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 하는 의심 섞인 물음들이었다.

도보를 고생과 걱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도 도보를 하겠다고 했을 때, 걷는 기간 동안

나를 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으려 한다고 했지,

나를 위한 선물이에요,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걷다 보니, 아직 100%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동안의 나를 잊게 되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걷는 일에만 몰두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단순해지는 경험을 하면서,

왠지 나 자신이 가벼워진다는 느낌을 얻곤 한다.


이렇게 내가 가벼워진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선물일까? 생각해 보았다.


내 몸도,

내 정신도,

내 몸속의 장기들도,

그리고 내 두뇌 속에 가득했던 온갖 상념들이 다 날아가 버리고 있는 듯 한 느낌,

그 느낌이 곧 선물일 것 같았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2015년 9월 4일, 까스트로헤리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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