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가장의 무게
슈퍼우먼이 되어야 하는 싱글맘
구부 씨(전남편)가 떠나고
여러 가지 감정변화를 겪어내고 있었다.
혼자라는 것이 무서웠다.
혼자 아이들을 책임지는 것이 두려웠다.
(잘못해낼까 봐..)
여자로서 삶은 포기해야겠구나 싶어 서글프기도 했다.
이혼녀라는 시선을 견뎌낼 수 있을까?
자신도 없었다.
몰랐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상황이 되니 더 크게 다가왔다.
이혼을 결정하고 진행할 때에는
불도저처럼 강한 모습이었지만
이혼조정이 완료되고나서부터
나는 멘털이 약해진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은둔형 외톨이로 2년을 보냈다.
코로나와 공무원 공부
두 가지 이유가 분명히 있었지만
당시 나는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바깥공기 한 줌도 나에게 상처로 느껴졌다.
음식물쓰레기와 재활용 버리는 것 외에는
사람도 만나지 않고 집 밖에 나가질 않았다.
그리고
점점 더 커지는 불안과 걱정이 생겼다.
싱글맘으로 살아내기
싱글맘으로 사는 삶은
막연한 고민이 아닌 현실이었다.
힘들다고 도망갈 수도 없고
아프다고 떠넘길 수도 없고
하기 싫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모든 마지막에는
어쨌든 나의 손을 거쳐야 하고
내가 해결해야 했다.
제일 커다란 걱정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이혼 후
큰 아이가 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
그 이전보다 곱절로 더 나가게 되는 교육비와
더불어 중학생을 앞둔 둘째의 교육비
교육비가 한 달 양육비보다 더 나올 때가 종종 있었다.
"아이들에게 집 형편이 이러하니
너희들 꿈을 접고 빨리 집안에 보탬이 되는 진로를 정해라."
이런 말을 죽어도 하기 싫었다.
아이들 미래를 포기하는 대가로
이혼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집을 팔아서라도
내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가길 희망했다.
죽음 직전에 날 살게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향후 필요한 생활비, 교육비 노후준비 등
계산기를 두들릴 때마다
한숨과 동시에 구부 씨(전남편)가 생각이 났다.
지난 십수 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보내주었던 구부 씨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구부 씨가 떠나고 가장이 된 다음에야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구부 씨 덕분에
그동안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걸 부인하지 못한다.
아이들도 마음껏 투정도 부리고
먹고 싶은 거 먹어가며 잘 자랐고
나 역시 일을 하든 전업으로 있든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구부 씨가 잘못한 것은 잘못한 거지만
가장으로서 역할을 잘해준 것에는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더군다나 아이들을 위해
재산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떠났다.
그것 역시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구부 씨가 떠난 후,
1톤 트럭을 한대 불러
불필요한 가구들과 자잘한 소품들을 모조리 버렸다.
(커다란 결혼액자까지 포함)
당근을 통해서 쓸만한 것들은 저렴하게 다 팔아버렸다.
집 안의 물건을 반 가까이 줄여버리고
더불어
교육비 외에 생활비와 모든 비용들 역시
절반 이상으로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양육비와 비상금은
전부 교육비 명목으로 쓰기로 결심하고
기타 비용과 생활비는
나의 소득으로 감당하는 걸로 계획했다.
계획대로라면
나에게 안정적인 직장이 절실했다.
이혼을 결정하던 해,
건강상의 이유로 나는 직장을 그만둔 상태였다.
나이와 경력이 있어 재취업도 쉽지 않았다.
(경력 따라 급여산정이 되어 경력자를 기피하는 곳이 많았다.)
계약직 입사는 가능했으나
50대의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그려지지 않았다.
고민만 하던 공무원공부를
이혼을 결정할 무렵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40대 중반의 나이,
20년 만에 시작하는 공부
할 수 있을까?
가능할까?
그런 고민은 나에게 사치였다.
어쨌든 먹고살려면 해내야 했다.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공부하면서 너무나 많은 문제에 부딪혔다.
건강이 나빠 응급실행도 여러 번 했고
열심히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아
몇 번이고 좌절을 하기도 했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받아가며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과 싸워가며 매일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이혼에 대한 아픔과 공허함, 슬픔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공부가 날 살렸다.
아마 그런 절실함이 없었더라면
배신의 아픔과 억울함으로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허덕였을 것이다.
주관적 해석이 아닌
객관적 해석이 필요한 공부를 거듭할수록
나의 상황마저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생겼다.
성장하면서
성취감을 느끼면서
상처도 조금씩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2년 만에 합격을 하고
아이들과 파티를 했다.
싱글맘, 가장으로 살아내는 일이 앞으로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잘 하든 못하든 어쨌든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버텨내리라.
아이들에게 든든한 나무가 되어주리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