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긴 누구야 나지
아이가 7살이 되니 나에게 새로운 역할이 주어진다. 예비 초등 엄마.
예비신부, 예비 며느리, 예비엄마에서 이제 예비 초등 엄마 혹은 예비학부모가 되었다. '예비'라는 말에서는 뭔가 준비를 잔뜩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감이 느껴진다.
알뜰한 살림살이 마련은 물론이고 결혼식장,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같은 갖가지 결혼 준비를 완벽히 해야 할 것 같은 예비신부, 싹싹함과 애교를 기본 탑재하고 시부모님의 취향을 완벽 분석해 마음에 쏙 드는 며느리로 변신해야 할 것 같은 예비 며느리, 똑 소리 나는 아기용품 구매부터 육아서를 섭렵하고 태교부터 시작해서 유아교육의 달인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예비엄마,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에서 아이가 뒤처지지 않게, 그로 인해 자신감을 잃어버려 아이들 사이에서 자칫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철저히 검색해서 엄마들 사이의 입소문을 귀담아듣고 좋은 책을 들여다 놓고(한 권씩 말고 한 질씩) 공부습관을 잡아주어야 할 것 같은 예비 초등 엄마.
와 이렇게 쓰는 것만으로, 숨이 차다 못해 숨이 막힌다.
나는 '옆에서 암만 이야기해봐야 하기 싫기만 하고 자기가 해야겠다 싶을 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라고 늘 이야기하는 태평한 엄마지만, 놀이터에서 간혹 "그 집은 뭐 시켜요?"라고 묻는 말에 '아.. 뭔가 시키긴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태평은 하나 뚝심은 좀 부족한 엄마랄까. 그래서 나도 참고서 두어 권을 결국엔 들여놓았다. "그냥 하루에 한 장씩만 풀려요~ 혼자 잘해놓더라고~" 하는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닉스 책과 연산 문제집. 그리고 한두 줄 문장을 넣어 그림일기 쓰기도 더하고.
아 그런데 '운전은 가족한테 배우지 마라.'는 말과 함께 이 말도 절대 진리였나 보다.
'자기 아이는 자기가 못 가르친다.'
왜 위에 있는 거 보고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도 못해서 C가 이 모냥이고, 일곱 살에서 한 살 더 먹으면 여덟 살 되는 건 알면서 7+1은 왜 모르는 건지. 7+1=8 은 알았는데 7-1=6은 왜 또 헷갈리는지. '밥' '집'을 분명히 앞에 써 놓고 '갑'은 왜 못쓰는지.
속에서 '천불'이 올라와 얼굴까지 빨개지는 것을 억지로 참아봐도 역시 큰 소리가 나온다. "아니~~~!"
마음 약한 아이는 엄마가 화를 내니 눈물이 핑 돌지만 차마 훌쩍 소리도 못 내고 얼른 손등으로 훔치는데, 참 그 모습이 얼마나 딱한지 얼른 또 반성하게 된다. '이게 뭐라고 애를 울리냐 이 못난 에미야.'
이렇게 눈물 찔끔하고 나면 안 하려고 하는 거 뻔히 알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가나다라 쓰기를 다시 시켰더니 역시나 며칠 동안 그림일기를 슬슬 피한다. "내가 잘 못해서 엄마 화나잖아." 글자가 쓰기 싫은 게 아니라 엄마를 화나게 만드는 게 싫은 것이다.
어렸을 적 친정엄마가 초등학생들 과외공부를 시킬 때 직접적으로 나는 엄마에게 배우진 않았지만 한 번씩 친구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같이 자습을 했었다. 그런데 같은 문제집을 푸는 데도 나는 속도가 훨씬 느렸다. 지문을 꼼꼼하게 읽어야 했고 해설을 두세 번 더 들춰봐야 했고 머릿속에 개념을 집어넣기까지의 시간도 더 필요했다. 금방금방 다음 장으로 넘기는 친구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난 좀 오래 걸리지만 확실히 외울 수 있지.'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의 기억일 텐데 그 상황이 명료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아마 나의 느린 속도가 스스로 좀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주눅 들지 않으려고 애써 생각했고 그렇게 노력했던 덕분인지 성적도 꽤 괜찮았다.
고3이 되어 가장 싫어했던 과목은 물리였다. 문과라서 그렇게 깊이 있게 배우지도 않았는데 '제물포'의 유혹이 엄청났다. 요즘 아이들도 알려나? '제 때 물리 포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가장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물리 문제집을 사서 씹어먹겠다는 각오로 덤볐다. 3분의 1 가량 맞췄을까. 죽죽 빨간 비가 그어지는 문제집을 보며 진짜로 입에 넣어 씹어먹고 싶었지만 머리카락만 좀 쥐어뜯으며 포기하지 않았다. 문과라서 말하기 쑥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수능시험에서 물리 만점을 받았으니 나와의 싸움에서 결국은 해낸 것이다. 오래 걸렸지만.
그러니 내 딸은 나를 닮았다.
친정엄마가 생계 때문에 내 공부는 방치하다시피 하셨는데 오히려 덕분에 내가 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딸에게 하는 것처럼 큰소리를 들었다면 내가 뭐든 덤벼볼 생각을 했을까. 오래 걸리는 동안 그냥 주저앉지 않았을까.
사람마다 자기만의 속도가 있다고 한다. 의욕이 솟을 때는 뛰기도 하고 그러다 잠시 멈춰 숨을 돌리기도 하고, 천천히 걸으며 아래에 핀 꽃들도 좀 보라고 한다.
아이에게도 자기만의 속도가 있다. 벌써 이만큼 앞서 간 어른의 스톱워치로 아이를 닦달해서는 안될 것이다. 언젠가는 자기 이름을 제대로 쓸 것이며 언젠가는 8천 원어치 물건을 사고 만원을 내면 2천 원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다 루트도 알고 인수분해도 알게 되겠지.
오늘은 아이보다 훨씬 못 그리는 말랑말랑 레이디 버그를 그리며 마음을 좀 다독여줘야겠다. 미라클 스톤을 빼먹으면 안 된다는 아이의 잔소리를 이번엔 내가 좀 들어줘야지.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