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플랜 abc
아이가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여자아이인지라 어렸을 때 내가 배우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발레나 무용을 배우게 해주고 싶었다. 체형교정에 좋고 유연성을 기르는데도 그만이라는 합리성을 얹은 나의 대리만족 추구였다.
요즘은 백화점이나 마트 문화센터에서 저렴한 비용의 아이들 발레교실을 쉽게 볼 수 있지만 80년도에는 체조나 달리기보다 왠지 더 고급스럽게 들리는 단어의 느낌처럼, 있는 집에서나 가능한 취미였다.
지금의 나는 두 다리를 90도 이상으로 만드는 게 미션 임파서블의 영역에 있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는 길쭉한 팔과 다리가 무용을 하기에 그만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그러나 “무용 한 번 시켜보지요.” 하는 피아노 선생님의 이야기에 우리 엄마가 고개를 내저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왜 무용 이야기를 했을까?) 레슨비에 의상비에 대회비에 그만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그 말씀이 참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고 지금도 그 피아노 학원 이름이 기억나는 걸 보면(이루다 음악학원.. 도전했더라면 이룰 수 있었으려나?) 어렸을 적 참 하고 싶었었나 보다. 무용.
잠자리 날개옷 같은 튀튀로 유혹해 아이를 문화센터 발레의 세계에 입성시키긴 했지만 코로나로 곧 폐쇄되었고 동네 발레학원에 들여놓자니 갑자기 문화센터의 저렴한 수업료가 너무 그리웠다. '다음 학기엔 열리겠지 꼭 필요한 교육도 아닌데.' 싶어 십만 원을 아끼기로 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태권도를 배우겠다는 것이다.
응?
번잡스러운 아이가 되는 것이 싫어 근처에만 가도 아이들의 아우성이 귀를 울리는 태권도장에 동생인 남자아이도 안 보낼 판이었는데 여자아이인 첫째가 태권도장에 가고 싶다고 한다.
"왜 가고 싶어?"
아이는 똑 부러진 대답을 내놓았다.
"놀이터에 가면 남자아이들이 나를 뒤에서 잡아당기면서 괴롭히는 게 싫어. 태권도를 배워서 강해지면 나에게 함부로 하지 않을 거야. 또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같은 반 여자동생이 있는데 내가 거미는 다리가 8개라고 했더니 믿지 않았어. 곤충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하고 알려주려고 했는데 나에게 바보라고 하면서 내 말을 안 들었어. 엄마, 나는 세지고 싶어."
아이는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냈던 것인데 나는 어리석은 엄마 행세나 했다.
아이는 태권도를 배우든 배우지 않든 이미 강해진 것 같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방법을 찾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한 설득에도 성공했다.
아이에게 가르치려던 '스스로 행복의 길을 찾아 단호하게 선택하기'라는 명제를 스스로 깨우쳤다.
신나게 학원으로 향한 아이. 이제 겨우 이틀밖에 다니지 않았고 생활체육시간이라 왕복 달리기만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벌써 얼굴엔 결기가 서려있고 꽉 쥔 주먹이 꽤나 매섭게 보인다. 태! 권! 도!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옹골차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늠름하게 보일지 거울을 보며 이미 각이 잡힌 단복 매무새를 한 번 더 점검한다.
플랜 a, b, c, d가 많을수록 인생에서 승리한다.
태권도를 배운다고 해서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한순간에 순한 양으로 바뀌지 않겠지만, 아이는 플랜 b를 또 생각해 낼 것이다.
생각하고 실행하고 수정하고 또 실행하는 용기,
아이에게서 오히려 내가 배워야겠다.
태! 권!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