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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석 Jan 20. 2024

세 번째 이력서

07.

 헤드헌터에게 이직 제안을 받았다. 벌써 올해 13년 차 월급쟁이며, 지금 회사는 내 두 번째 회사로 8년을 넘게 다녔던 고향 같은 첫 회사를 떠나 처음 이직한 회사다. 불안 반, 설렘 반으로 영 아니다 싶으면 얼른 튀어야지, 한 번이 어럽지 두 번이 어려우랴 싶은 마음으로 첫 출근했던 날이 기억난다.


 일단 딱 한 달 만 다녀보자 마음먹었었는데, 벌써 사 년이나 눌러앉아있다. 첫 한 달 동안, 지급받은 노트북과 사무용품 외에 내 개인 물건은 일절 회사에 두지 않았다. 기껏해야 펜 하나와 수첩 하나만 달랑달랑 가지고 다녔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자 그제야 마음을 두고 사무용품 살림살이들을 구비하던 날 보며 동료들이 웃었다. 드디어, 이제야 자리 잡는 거냐며.


 밀어주던 상사, 의지하던 동기들, 내 손으로 일을 가르쳤던 후배들을 뒤로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가끔 조금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또 새로 만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일하다 보니 4년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그사이 경기는 더 어려워졌고 내 월급 빼고 물가, 이자, 부동산 가격이 미친 듯이 다 올랐다. 한 때 업계 1위에 황제주 소리까지 듣던 내 두 번째 직장은 과거의 영광이 무색하게 계속 고전 중이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갑자기 회사가 망한다거나 다른 곳으로 팔려갈 것 같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미 이곳은 성장동력을 잃은 것 같다. 그래서 근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걱정하는 따뜻한 물에 안주하다 삶아 죽어지는 개구리 신세가 될까 봐.


 그런 복잡한 마음을 하늘이 알았는지, 갑자기 꽤 매력적인 이직 제안이 왔다. 수행할 직무 내용과 우대 조건을 살펴보니 그간 내 경력과 핏이 잘 맞는다. 그런데 타이밍이 좀 아쉽다. 올해 이곳에서 부장 진급 차수인 나는 부장으로 진급하고, 올 연말까지 만 5년 정도를 꽉 채운 후, 리더 포지션으로 이직 시장에 본격적으로 나가볼 생각이었는데 지금 움직이면 연차도, 직급도, 인센티브도 좀 애매해질 수 있다.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 '그건 일단 된 다음에 생각하여도 되는 거 아니니?'라는 현실 자각 이성인자가 고개를 든다. 그래, 일단 서류도 안 넣어보고 무슨 미역국을 사발로 마시니.




 네임밸류도 좋고, 근래 업계에서 꽤 핫한 회사라 헤드헌터가 지원여부를 거듭 재촉했다. 4년 전, 이직 후 이력서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니 빨리 업데이트해서 달란다. 그래, 일단 못 먹어도 고! 오랜만에 시장에서 내 가치를 측정해보고 싶어 퇴근 후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옛 이력서 파일을 열어봤다.


 이렇게 허술했다고?


 자화자찬 일색에 대체 뭘 어필하려고 했는지 모를 이력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렇게 어설펐는데 대기업 출신이라고 콧대가 하늘을 찔렀던 나를 받아준 지금의 직장에 고마울 지경이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지난 경력들도 다듬고, 추가될 이력들도 다시 한번 꼼꼼히 채용자 입장에서 어필 포인트를 잡다 보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제법 열심히 살았구나.


 아무래도 이직 후, 내 마음가짐은 확실히 첫 회사와 달랐다. 주어진 일 이외에는 굳이 나서지 않았고, 주목받을 수 있는 큰 프로젝트들도 굳이 욕심내지 않았다. 내 연차와 직무에 맞지 않는 자잘한 일에도 불평불만 없이 담담히 일했다. 부사수는커녕 변변한 후배랄 것도 없는 장돌뱅이 경력직은 그저 철저히 워라밸을 추구했으며, 회사에서 나서는 순간 일과 관련된 생각들은 머릿속에서도 깨끗이 로그아웃시켰다. 대신 건강이 좋아졌고, 안색이 밝아졌으며 주변에서 인상이 편안해 보인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그런데 문득 '이러다 회사에서 그만 오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는데?' '나는 과연 회사에서 잡을 만한 인재일까?' 싶은 의문이 논두렁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평온했지만 한편으로 불안했다.


 정리한 이력서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지내온 날들이 고스란히 기입되어 있었다. 작은 일이었어도, 상사에게 별로 주목받지 못했어도 묵묵히 해왔던 일들. 몇 년 전부터 관심이 생겨 꾸준히 공부했던 분야들. 연휴를 온통 반납하고 침침한 눈으로 공부하여 재수 끝에 취득한 자격증들. 마침내 대학원 논문을 마무리하고 빛나는 학사모를 다시 한번 썼던 일.


 첫 번째 이력서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햇병아리였던 나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알리려고 발버둥 치던 흔적이었다면, 두 번째 이력서는 청춘을 갈아 넣었던 찬란했던 영광의 순간들의 점 칠 된 흔적이었다. 이번에 정리한 세 번째 이력서는 첫 번째 이력서처럼 재기 발랄하지도, 두 번째 이력서처럼 화려하지도 않지만 오피스 정글에서 거센 풍파들을 묵묵히 버티며 계속 그 자리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흔적들 같아서 스스로가 대견하고, 또 찡했다.  


 이미 패는 던져졌기 때문에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뿐.


 2024.01.20 한 줄 평

 잘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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