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조합 내 권력 다툼
반대파(비대위)에서 쳐들어올까 용역 경비까지 사전 배치했던 조합장 할아버지의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오히려 도발로 느꼈는지 총회 이후 비대위의 역공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비대위는 기존 조합장과 임원들을 해임시키기 위한 서면 동의서를 조합원들에게 받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에게 수시로 전화하고, 연락을 피하면 집까지 찾아왔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기존 조합의 편에 설 것인가, 비대위의 주장대로 새로 조합을 구축해야 할까?’
마치 조선왕조사극처럼 ‘기존의 왕을 지킬 것인가, 무능한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정변에 가담할 것인가’ 갈등되는 시점이었다. 양측에서는 조합원들을 각자의 편으로 포섭하기 위한 전쟁에 사활을 걸었고 이는 당연히 일상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업무 중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수시로 걸려왔고, 낯선 이에 의해 단체 카톡 방에 초대되는 경우가 예사였다. 심지어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누군가 늦은 밤 직접 찾아오자 공포심을 동반한 일종의 위협으로 느껴졌다. 기본 생활권 침해로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아 하루하루 미칠 지경이었다.
조합에 '대체 조합원들의 정보와 개인 주소와 연락처를 어떻게 낯선 이들이 알고 집까지 찾아오냐고' 항의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절망적이었다. "조합원 자격을 갖추고 있다면, 다른 조합원, 전체 조합원의 명부를 공공 열람할 권한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다. 그걸 조합에서 제지할 수 없다"는 답변을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했다.
조합원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조합이, 조합원 개인의 일상이 이렇게 침해당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수수방관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자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평온한 주말 아침에도 기존 조합 부정부패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며 현관문을 두드리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은 소름이 끼쳤다.
그때만 해도 나는 기존 조합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조합장 할아버지를 포함한 고령의 임원들의 업무처리 능력이 마음에 차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으로서 오랜 시간 아파트를 지킨 분들의 '내 집 마련'에 대한 간절함은 믿어 볼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을 사로잡는 화려한 언변이나 폭풍 카리스마를 보여주진 못했지만, 최소한 조합원들 앞설 때 의관을 갖추고 할 말을 미리 준비해 오시는 태도를 눈여겨보았다. 또한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목소리에서 적어도 '사짜' 같은 분위기 보다 오히려 진정성이 느껴졌으니까. 털어서 먼저 안 나오는 사람이 없다.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그 자리에 누굴 세워도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새 조합 설립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조합원들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 특히 내 집 마련, 실 거주 목적이 아닌 적당한 때에 투자 시세 차익을 노리고 후발로 합류한 조합원이 현재까지의 귀신아파트의 사업률에 대해 시뮬레이션한 분석표를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 분위기 반전의 키였다. 이문 앞에 장사 없다고, 나처럼 기존 조합에 온정적인 입장을 유지하던 사람들도 급격히 노선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 분석표가 얼마나 정확한지, 제대로 시뮬레이션된 것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행동을 시도한 것 자체만으로도 기존 조합의 주먹구구식 운영을 반증하는 것 같았으니까.
전세의 뒤집힘 기류를 감지했는지, 수세에 몰린 조합장 할아버지는 장문의 문자로 앞으로 재건축 사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호소문을 보냈다. 부디 비대위에 협조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과 함께.
낯선 이들의 전화나 카톡은 차단하면 그만이었지만,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계속 날이 서있었다. 또다시 낯선 이의 불시의 기습을 당하자 그 길로 조합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조합명부를 타 조합원이 열람해 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렇게 취득한 개인 정보로 계속 일상을 침해하는 행위를 조합에서 계속 두고만 보고 있다면, 나도 더 이상 기존 조합을 지지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조합원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조직이, 조합원들을 이토록 고통받게 내버려 두는 건 명백한 직무 유기라고 느꼈다.
결국 다수의 조합원들이 비대위의 편으로 돌아섰고 머지않아, 기존 조합장 할아버지는 해임통지서가 도착했다. 조합장 할아버지는 곧바로 조합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본인의 억울함과 비대위의 횡포에 대해 하소연하셨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스마트하게 방어하지 못하고 기존 조합원들의 온정에만 기대 안일하게 행동했던 쓰라린 결과, 어쩔 수 없는 자업자득이다.
차라리 감정에 호소하는 전화대신 본인과 조합 임원의 비리 의혹에 대해 명확한 증빙자료를 통해 명명백백 소명했다면? 비대위가 유포하던 사업성 분석표의 개별 항목별 가정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했다면? 기존 조합이 추진해 온 사업성의 근거 자료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했다면? 그도 아니라면 나처럼 낯선 사람들의 무분별한 접촉을 질색하는 하는 조합원들을 위해 조합원들의 고충을 해결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그랬다면 조합장 할아버지는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을까?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었다.
이후 기존 조합 임원들도 줄줄이 해임되었고, 새로운 조합장과 임원 선출을 위한 후보 등록이 시작됐다. 새로 전열을 정비해 다시 사업에 풀엑셀을 밟으면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귀신 아파트 재건축 사업은 브레이크 상태였다.
신규 조합 설립을 주도하는 비대위원장 아주머니가 재건축, 재개발 사업을 훼방 놓는 전문 꾼이라는 소문은 예전부터 만연했다. 추가로 본인의 사위를 허수아비 조합장으로 내세워 조합 사업을 마음대로 쥐락펴락 할 것이라는 찌라시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대비마마 수렴청정하는 소린가. 산 넘어 산이었다. 종처럼 재개되지 않는 사업과 끊임없는 잡음들 속에서 속이 새까맣게 타기 시작했다.
월급쟁이 신세가 고달 퍼도 '그래도 내 집 한 채는 있다'는 생각에 힘이 되었던 귀신아파트는 온 데 간데 사라졌다. 대신 명백한 투자 실패인 인 것 같아 생각만 해도 고구마 백 개를 삼킨 듯 한 답답함이 명치부터 단전까지 몰려오는 애물단지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