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인 체계와 신규 조합 탄생

12. 조합의 재건

by 이예석

기존 조합장과 임원들이 모두 해임되면서 조합은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되었다. 사업은 멈췄고, 시공사는 끝내 계약을 해지했다. 조합원들의 혼란은 극에 달했지만 구심점 없어 시공사와 다시 소통하기가 어려웠다. 시공사가 진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당초 기대했던 수익성과 큰 차이가 나서 하차한 것인지, 아니면 찌라시 내용처럼 기존 조합이 해체되면서 더 이상 그전처럼 유착관계가 이뤄질 수 없다는 판단으로 발을 빼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새 로운 조합장과 임원들이 선출되기 전까지, 정부에서 귀신 아파트 정비사업의 대리인을 지정해 줬다. 대리인 변호사님은 본인은 ‘어디까지나 대리인’ 일뿐이며, 하루빨리 재건축 사업이 정상화되도록 돕는 것이 본인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리인이 권력을 잃은 전임 조합장 세력 편이라는 둥, 새로운 비대위 세력 편이라는 둥 뒷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능력의 고하를 막론하고, 제3자 대리인에 의해 사업이 진행되자 더욱 밤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법률 전문가이니 오히려 잘 된 걸까?'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곧바로 '주인의식이 없는 대리인일 뿐인데 과연 자기 일처럼 살뜰하게 챙겨줄까?' 싶은 의심이 피어올라 마음이 복잡 해졌다. 어느덧 매수 후 벌써 4년 가까이 지났지만 귀신아파트는 여전히 환골탈태는커녕 흉물스러운 모습 그대로 철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주비 대출에 대한 이자를 앞으로 조합에서 대납할 수 없으니, 개인이 각자 부담해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그간 조합이 이주비 대출 이자를 대신 납부해 줬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이자비용 부담을 덜고 있었다. 조합이 해산되어 해당 업무를 처리할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무이자처럼 여겨졌던 이주비 대출금이 하루아침에 매 달 값아야 할 실질 부채로 변한 것이다.


월 이자비용을 계산해 보니 생각보다 꽤 큰 금액이라 심리적 부담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조합 명의의 집단대출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이자율에 결국 나는 더 낮은 금리인 개인 신용대출을 일으켜 이주비 대출을 대환 처리했다. 이후 목돈이 생길 때마다 대출 원금을 숨 막히게 갚아 나갔다. 하루빨리 이 수령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도통 묘수가 보이질 않았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간헐적으로 구 조합과 비대위 세력은 서로에 대한 비난이 우편물을 보내기 바빴다. 재건축은 총사업비를 줄이는 것이 수익성과 직결된 만큼, 하루라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서둘러 사업 정상화가 필요했지만 서로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만 난무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각종 사업비용 지급이 연체되었고, 심지어 일부 항목은 연체 이자까지 부담해야 해서 가뜩이나 저조한 수익률이 아주 나락으로 치달았다.


이때가 투자 실패에 대한 자책으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가장 극에 달했던 때였다. 귀신 아파트 매수 결정에 대한 후회가 썰물처럼 밀려왔다. 처음부터 시세차익을 노린 투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중간에 매도 기회에 있었을 때도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곧 정상화될 거야.'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다. 조합도, 건설사도 사라진 지금은 웃프게도 가지고 있는 패가 똥패인 것이 자명해 아무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어 손절도 불가했다.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상황이라는 말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도 얼마 후 새로운 조합장과 신규 임원들이 선출되어 사업의 청신호가 켜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새 조합은 끝내 기존 시공사와 재협상에 실패했고 시공사는 사라졌다.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건설사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워낙 소규모의 아파트 단지인 데다 당시에도 여전히 건설경기가 침체여서 아무리 공개 입찰 공고를 내도 지원자가 없었다. 이러다 정말 ‘사업이 파산해 아파트가 강제 경매로 넘겨지는 것 아니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뉴스에서 유사한 사례로 재건축 아파트가 집단 경매에 넘어간 사건이 보도되며 불안감이 더 커졌다.


귀신 아파트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됐다. 재건축 사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점점 현실화되는 것 같아 온몸에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큰돈이 아닐 수 있지만, 내겐 전 재산이었다. 청춘을 다 바치고, 아픈 몸을 하고도 한 푼 두 푼 어렵게 모았던 전 재산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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