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신규 건설사 찾기
영원한 건 없다. 하루아침에 야당이 여당이 되고, 여당이 야당이 되는 세상이다. 기존 조합에 반기를 들었던 비대위는 구세력을 몰아내고 메인 세력이 되었다. 반대로 밀려난 구 세력은 New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구조합장 할아버지와 기존 조합임원들은 새로 전열을 가다듬고 역공을 시도하는 듯했지만, 이미 사업이 많이 지연된 상황이라 민심은 싸늘했다.
오히려 고래싸움에 애꿎은 조합원들의 희생만 커지고 있었다. 구조합은 그동안의 사업 자료들을 새로운 조합에 제대로 넘기지 않았다. 왠지 익숙한 상항 아닌가? 정말 자료를 모두 파기한 건지, 아니면 훗날을 위해 어딘가에 안전히 감추어 두었는지 모르겠다. 새로운 조합임원들은 인수인계는커녕 아무것도 없는 빈 사무실에 입성해야 했다. 예전 자료를 내놓으라고 한바탕 푸닥거리를 한 모양이다. 이후 정부기관 도움을 요청했는지, 내가 잘 모르는 법적 조치를 취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자료를 받아냈다고 했다.
그렇게 대리인 체제에서 새 조합 체제로 사업이 다시 재개되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시공사의 부재가 시급했다. 공개 입찰에 처음에는 딱 한 곳만 입찰을 했다. 단독 입찰로는 조합원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조합에서 부지런히 영업을 했는지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시공사 후보가 5개가 됐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1군은 아니지만 제법 이름 있는 2군 건설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기존 시공사도 듣보잡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로 수도권 외곽에 소형 아파트를 주로 시공하던 곳이었는데, 새로 등장한 후보는 서울 도심에 대형 아파트들을 다수 시공한 이름 있는 중견 건설사였다.
'드디어 눈물의 세월 끝에 빛을 보는 날이 오는가.' 싶어 마음속으로 '올래'를 외쳤다. 건설사 이름을 공개하긴 어려우니, 그 유명 건설사를 앞으로 '마운틴 건설사'로 칭하겠다. 나는 제발 마운틴 건설사가 새로 시공을 맡게 되길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다른 '오션 건설사'였다. 오션 건설사는 앞서 말한 단독 입찰을 했던 곳이다. 사업 이력을 살펴보니 아파트보다는 상업 건물들을 주력으로 시공한 소형 건설사로, 미안하지만 아파트 건설에서는 신예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시공사 선정을 앞두고 각 건설사에서는 나름대로 물밑 작업에 열을 올렸다. 지인 중에 서울의 노른자 땅에서 재건축을 해본 사람이 말하길, 건설사 관계자들이 조합원들 집까지 찾아와 각종 선물 공세를 펼친다며, 그걸 뿌리치느라 곤란했다고 했다. 꼬마 아파트인 귀신 아파트는 그 정도 급은 되지 않았는지 건설사 관계자들이 조합원들을 일일이 찾아 영업하는 대신, 삐까번쩍한 브로슈어들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발코니 무료 확장', '고급 샷시', '빌트인 에어컨' 등 조합원만의 특혜를 강조했다.
다음 총회에서 시공사 선정 투표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현장에 모인 사람이 생각보다 적었다. 시공사 선정은 법적으로 조합원들의 2/3 이상이 반드시 현장 참석해야 하며, 그중 과반의 찬성표가 있어야만 통과된다. 총조합원이 고작 2백 명이 겨우 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현장에 모인 참석자는 1백 명이 채 안 되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아직 총회 시작 전이니 각 시공사들의 설명을 들으며 다른 조합원들이 더 오기를 기다렸다.
각 시공사별로 본인들이 준비해 온 발표 자료를 스크린에 띄우고 대표 담당자가 나와 프레젠테이션을 실시했다. 사전에 '다른 건설사에 대한 비방 금지' 공지가 있었다. 사회자가 본인들의 회사 소개와 향후 시공계획만 소개하라고 안내를 분명히 했는데, 갑자기 마운틴 건설사가 오션 건설사를 맹렬히 비판하는 내용의 슬라이드를 펼쳤다. 멀쩡히 회사 소개를 잘하다가 갑자기 대북 홍보물 같은 붉은 글씨로 가득한 화면들이 나오더니, 오션 건설사가 얼마나 아마추어 회사인지 폭로하며 신용도가 낮아 이전 사업을 제대로 승계받기 어려운 회사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순식간에 현장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나 역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얼어버렸다. 때마침 갑자기 누군가 사무실 뒤에서 고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비열하게 하면 안 되지 않냐"라고 욕하기 시작했고, 나를 포함한 조합원들은 그저 놀란 토끼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기 바빴다. 마운틴 건설사 담당자는 조합원들도 제대로 알 권리가 있다며 물러나지 않았다. 언성이 높아진 맛대맛 현장에서 결국 사회자가 양쪽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머지 건설사들도 브리핑을 마쳤다.
현장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머지 3곳은 들러리인 듯했고 결국 네임드 대형 건설사인 마운틴 건설사와 예전부터 귀신아파트 사업에 눈독을 들이던 소형 오션 건설사의 2파전 인 것 같았다.
당시 나는 2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 왜 이렇게 작은 사업에 왜 마운틴 건설사가 입찰했을까? 또 상대적으로 듣보잡인 오션 건설사에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둘째, 객관적 봐도 회사 규모나 네임밸류 차이가 큰 데, 왜 조합원들은 여전히 오션 건설사와 사이에서 고민하는 분위기지? 앞으로 조금이라도 집값에 프리미엄이 붙으려면 마운틴 건설사를 택하는데 당연하지 않은가?
두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은 다음 총회 때 풀렸다. 우려했던 대로, 그날 총회는 조합원들의 2/3가 참석하지 않아 투표 자체가 무산됐다. 기껏 시간을 내서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왔는데 허탕이라니! 직장인의 소중한 주말 하루를 몽땅 허비한 것보다 찜찜했던 점은 따로 있었다.
현장 분위기로 보건대, 시공사 선정과정에서 ‘혹시 나 같은 평범한 조합원은 모르는 무언가 은밀한 내막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구린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혹시 풍문으로만 듣던 ‘오션 건설사와 신규 조합 멤버들의 새로운 정경유착?’ 뭔가 '역사는 되풀이된다' 스멜인데 실체적 진실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어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