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과 선택의 분리
아이에게 요령과 편법은 성공을 보장하고, 원칙에 따라 노력하면 실패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어른을 만나면 당신은 뭐라 하겠는가? 세상의 지혜를 알려준 현인이라고 칭송할 것인가? 아마 그 사람은 “세상은 원래 그렇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믿는 분이라면, 더 이상 읽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나는 그런 인간을 경멸한다. 노력은 실패할 수도 있다. 때로는 편법이 통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세월호 사건”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원칙이 무너진 배가 얼마나 쉽게 침몰하는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세상이 그렇다면, 그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어른들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어른이라면 새로운 세대에게만큼은 원칙을 지키고 소신에 따라 노력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어른의 의무다.
그런데 이 경멸받아 마땅한 짓을 저지르는 집단이 있다. 이 더러운 것은 힘도 세다. 나름 고상한 척, 수상쩍은 레토릭으로 자기 짓을 덮지만, 딱 그렇게 행동한다.
그것의 이름은 “대한민국 교육부”다.
며칠 전 나온 기사에 따르면, 2026학년도 수능 탐구영역 예상 선택은 이렇다. 사회탐구 두 과목을 고른 학생이 약 61%, 과학탐구 두 과목을 택한 학생은 22.7%에 불과하다. 나머지 16.3%는 사회와 과학을 한 과목씩 조합한 경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회탐구 두 과목을 택한 학생이 모두 문과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올해 수험생의 절반 가까이는 원래 이과 계열 학생이다.
즉, 공대를 가기 위해 사회문화와 생활과 윤리를 공부하는 일이 일상이 된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낳는다. 만약 공대 입학을 준비하며 물리·화학을 끝까지 공부한 학생이 손해를 본다면, 그것이야 말로 슬픈 일이다. 원칙대로 노력하면 실패한다는 것을 제도가 직접 가르쳐 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물리와 화학을 피하고 사문·생윤을 선택 한 학생이 실패한다면, 그것을 정의의 실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의 비열함이다. 달콤한 꿀로 꾀어 아이들을 함정에 빠뜨린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결국 누군가는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고, 사회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교육부는 늘 이렇게 주장한다. “학생 선택권을 확대했다”, “진로 맞춤형 교육을 실현했다.” 듣기엔 고상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이과 학생이 공대를 가기 위해 사회문화와 생활과 윤리를 택하는 상황을 어떻게 ‘진로 맞춤형’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경제·경영학과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이 정작 경제 과목을 외면해도 상관없는 구조를 두고, 그것을 ‘선택권 확대’라고 말하는 게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사실 수능의 목적은 단순했다.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초 학업 능력을 평가하는 것. 그러나 지금의 수능은 그 마저도 스스로 배신했다. 필요한 기초 능력을 묻지 않고, 누구의 선택이 더 요령 있는가만 따지고 있다. 대학이 필요로 하는 준비된 학생을 가려내는 대신, 기초가 부족한 학생을 대거 밀어 넣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평가가 아니라, 단순한 줄 세우기일 뿐이다.
이과가 사탐을 볼 수 있게 만든 주체는 대학이 아니다. 바로 교육부다. 대학은 전공 기초가 무너질까 우려했지만, 교과부는 ‘선택권 확대’라는 구호를 내세워 그 시도를 가로막았다. 그 결과 오늘의 사탐런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전공에 맞는 기초를 무시하는 오늘의 기형적 선택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선택권이 아니라 방임이고, 맞춤형이 아니라 왜곡이다. 교육의 본질을 잃은 채 줄 세우기만 남은 시험을 포장하는 얄팍한 수사일 뿐이다.
그리고 교육부는 그 모든 책임을 학생과 학부모에게 떠넘긴다. “네가 선택하지 않았나?”라는 말 한마디면 끝이다. 기초 지식이 부족한 학생은 대학의 몫으로 넘겨 버린다. 대학은 준비 안 된 신입생을 다시 가르쳐야 하고, 사회는 원래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한 인재를 떠안는다. 교육부는 그 과정에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학생의 실패는 개인의 잘못이 되고, 대학의 부담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된다. 결국 제도만 살아남고, 교육은 죽는다.
가끔 정책 입안자들은 정책이 실패한 이유를 국민의 욕심과 무지에서 찾는다. 이번 경우라면, 학생과 학부모가 본인들의 욕심 때문에 “선택권 확대”라는 대의를 손상시켰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희대의 망발이다. 제대로 된 정책은 국민의 욕심과 불안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다.
차라리 공부 대신 노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원칙을 지킨 학생이 손해를 보고, 대학은 기초 교육을 다시 떠안으며, 교육부는 책임을 모조리 전가한다면, 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가 더 어려워진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공대를 가기 위해 힘들더라도 물리와 화학을 붙든 학생들이 만약 그 선택 때문에 손해를 본다면, 그건 누가 책임지는가? 학생도, 학부모도, 대학도 아니다. 그것은 교육 제도의 책임이며, 곧 교육부의 책임이다. “적성과 진로에 맞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 원칙을 지킨 자가 손해를 본다면, 그 사회의 교육은 이미 무너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