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자주 이름은 듣지만 읽지 않는 책들이 세계문학에는 몇 권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도 그런 책들중의 하나다. 아마도 내가 고등학교 때 한 번 읽고 나서, 나는 한 번도 이 책을 다시 읽은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기억하는 대목이 두 군데 있다.
첫째는 주인공 이반, 아마도 형제 중 가장 지적인 인물,이 기독교와 악의 존재가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부분이다.
이반은 신이 천국문을 열어준다고 해도 들어가기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러시아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예로 든다. 수백명의 농노를 거느리는 러시아의 한 귀족에게는 아끼는 개가 한 마리 있었다. 하루는 농노의 어린 아들이 돌을 던지는 장난을 하다가 실수로 개가 돌에 눈을 맞아 실명하게 된다. 귀족은 화가 나서 그 어린 아이를 발가벗긴 뒤 개들을 풀어서 그 아이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게 한다.
이반은 이렇게 말한다. 그 귀족과 그 어린 아이가 둘 다 천국에 가서 서로 만나게 되면, 서로 화해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설사 화해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겪은 끔직한 고통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는가. 그럼 끔직한 악행도, 어린아이의 무고한 고통도 그저 천국이라는 구실로 지워질 수 있다면 그런 천국 따위는 나는 거부한다. 이반은 그렇게 말한다. 어린아이의 고통. 죄를 짓지 않은 순진무구한 아이의 고통. 이것은 기독교가 설명할 수 없는 가장 곤란한 문제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자마자 굶어 죽는 수만명의 어린 아이들. 기독교의 자애로운 신이라는 이미지는 이 냉엄한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허깨비 같은 이미지다.
순진무구한 존재의 고통. 죄를 지을 시간조차 없었던 아이들의 고통. 아마도 이것이 내가 기독교를 버리게 된 이유다. 불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없다. 왜냐면 삶의 기본적인 진실은 고통이라는 것이 불교의 근본교리이기 때문이다. 삶은 당연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거기에는 죄의 개념이 발을 들여놓을 자리도 없다. 로마 노예선에 쇠사슬로 묶여 노를 젓는 노예처럼 인간들은 세상에 묶여서 죽을 때까지 노를 저을 뿐이다.
두번째로 내가 이 책에서 기억하는 대목은 첫번째에 비해서 훨씬 유쾌한 부분이다. 이반과 대화를 나누는 악마는 자기가 목격한 어느 노르만족 처녀의 고해성사를 얘기해준다. 아름다운 몸매에 달콤한 성품을 가진 이 처녀는 신부에게 결혼전에 남자와 잤다고 죄를 고백한다. 신부가 처녀에게 묻기를 “왜 그런 죄를 지었느냐?”그 여자의 답은. 그리고 그 답은 책의 원본에도 불어로 쓰여져 있다. “Ça lui fait tant de plasir et si peu de peine à moi.” “신부님. 그것(섹스)은 그에게 너무나 큰 쾌락을 주었고, 저에게는 아주 작은 고통밖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연스럽게 번역하자면, “그이는 너무나 좋아했고, 저는 아주 조금 밖에 아프지 않았어요.”
악마의 보고에 따르면, 이 말을 듣고 신부는 그 처녀에게 홀딱 반해서, 나중에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왜 남자는 이 말을 듣고 여자에게 반하는 것인가? 남자는 자신을 위해서 고통을 감수하는 여자에게 빠지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대목이 수십년이 지나도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 여자가 한 말은 분명 남자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