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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사가 Apr 15. 2022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4월의 파리에서

100일 글쓰기 - 89


4월의 파리에서(En Avril, à paris), 제목부터 낭만의 한도 초과다. 봄의 한가운데 4월에, 다른 곳도 아닌 파리라니. 도시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모두 다르지만 파리는 그 자체로 로맨틱과 동의어다. 쓰레기를 가져다 놔도 감성적일 것이란 말이 농담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도 아마 그 때문 이리라. 보랏빛 라벤더와 붉은 장미가 뒤덮인 계절은 화룡점정일 테다.


불가리아 출신의 클래식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1929-2012)에 의해 편곡된' 4월의 파리에서'라는 곡은 원래 샹송이다. 샤를 트레네(1913-2001)라는 싱어송라이터의 곡인데, 샹송에 재즈적인 요소를 가미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대중들에게 가장 익숙한 곡으로는 La mer(바다)가 있으며, 잭 니콜슨의 연기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 수록된 Que reste-t-il de nos amours?(우리의 사랑엔 무엇이 남았나?)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첫 음부터 예사롭지 않다. 한 편의 로맨틱 영화 같은 곡이다. 이른 아침부터 머릿속을 부유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어떤 남자, 여행지에서 누군가와 우연이 겹치고 겹쳐 결국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된 어떤 여자, 일터에서 피 터지게 싸우다 실없는 한마디에 웃으며 눈을 마주치는 그들, 잠깐 한눈 판 사이 저 멀리 뛰어가버린 아이를 쫓아 달려가는 부부,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사이좋게 서로 다른 맛을 나눠먹는 어린 학생들, 지팡이와 마주 잡은 손에 의지해 분수대 앞까지 걸어온 노부부. 눈을 감으면 따뜻한 햇살과 푸른 잔디밭, 솟아오르는 분수대와 물보라 때문에 만들어진 무지개, 그리고 상상 속의 사람들이 그려진다. 나도 모르게 4월의 파리에 가 있다. 감은 눈을 뜨면 누군가 옆에서 노랗고 빨갛고 보랏빛의 예쁜 꽃다발을 불쑥 내밀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마음이 충만해진다. 비록 현실은 하루 종일 안방에 갇혀있지만 마음은 파리에 있다. 센강변을 걸으며 모르는 사람과 Bonjour? 인사도 나누고, 딱딱해서 속을 파먹어야 할 것만 같은 바게트 빵도 사본다. 코딱지만 한 에스프레소 잔을 우아하게 들며 쓰지 않은 척 마셔도 보고, 노천카페에서 이국적인 풍경화 속의 등장인물처럼 앉아있어도 본다. 한국에선 절대 하지 못할 말도 내뱉는다. 저 남자 참 잘생겼다, 저 여잔 어쩜 저렇게 예뻐?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한국어로 생각나는 대로 마구 중얼거리며 깔깔 웃는다.


음악이 주는 행복이다. 음들이 흘러가는 순간, 여긴 파리다. 이런 행복이라면 수백 번도 감사하다.






 * 악보로 남겨놓지 않은 곡을 아믈랭(영상의 피아니스트)이 듣고 채보했다고 합니다. 이후에 바이젠베르크의 막내딸이 악보를 발견했다고 하고요. 여러 버전의 악보가 탄생한 배경이 생각보다 복잡하더군요. 저도 한번 쳐보고 싶어서 악보를 봤는데 만만치 않습니다. 완벽하진 못하겠지만 언젠간 연주할 수 있겠지요.

https://youtu.be/7k2vQgC_h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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