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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사가 Feb 12. 2022

슈만, 피아노 협주곡 라단조 Op.54

100일 글쓰기 - 25


슈만은 평생 딱 한 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법정 투쟁을 불사한 끝에 드디어 클라라와 결혼하고 사랑의 결실을 이룬 벅참을 이 곡에서 마음껏 표현했다.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곡이지만 동시에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를 위한 곡이기도 하다. 슈만-브람스-클라라의 사랑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피아노 협주곡만큼은 제법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조성진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 데뷔 무대가 있었다. 20대의 젊은 피아니스트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곡을 어떻게 연주할지 한껏 기대가 되었다. 첫 연주인 데다 유머레스크의 감동이 아직 여전해 같은 슈만 곡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낼지 궁금했다. 새벽 4시, 적막 속에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의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날카로운 음이 울린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가 번갈아 강렬한 대화를 나눈다. 오케스트라는 불같이 타오르는 사랑을 어찌하지 못하고, 피아니스트는 뜨거움에 재가 될까 연신 이성을 불어넣는다. 오케스트라의 휘몰아치는 감정 위에 피아니스트는 침착하게 생각을 얹는다. 이 사랑에 몸을 맡기고 싶지만 그 끝이 무엇일지 두려워하는 양가감정을 여실히 표현해낸다.


그러나 결국 사랑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래야 하듯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거대한 파도 앞에 인간의 냉철함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그리고는 있는 대로 표현한다. 사랑한다는 말로도 담아내지 못할 이 마음을, 순수하고 정결한 이 사랑을. 제발 나를 알아 달라, 끝없이 헤집고 파내어 보여준다. 오롯한 외길이다.


마지막은 기쁨의 환희다. 사랑의 결실에 환호한다. 오케스트라는 준비된 모든 음들을 기쁘게 뱉어낸다. 그런데 이때, 피아니스트에게서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뜸 미래를 가져온다. “사실 지금 당신에게 청혼하고 있어요, 우리가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이렇게 행복할 거예요, 당신과 내 앞엔 눈부신 내일이 준비되어 있죠.” 젊은 청년의 기대감이 드러난다. 사랑의 달콤함과 부드러움에 잔뜩 취해 장밋빛 미래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손 끝 마디마디마다 음들 하나하나마다 사랑을 실어 보내고, 드디어 폭발한다. 그 어떤 연주자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전율이다. 사랑에 대한 환상을 지닌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연주다. 하지만 끝내 웃을 수만은 없다. 연주자가 혼신을 다해 그려낸 그 사랑이, 한없이 가벼워져 사라지던 수많은 시간을 우리는 겪었고 또 견뎌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결코 이 곡과 이 연주를 놓을 수 없다.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사랑이며, 끝내 품어 지키고 싶은 단 하나이므로.






* 2022년 1월 15일 베를린에서의 연주가 라디오로 방송되었습니다. 다음날인 16일의 연주가 더 좋았다는 평이 많던데, 첫 연주는 그것만으로 분명한 의미와 매력이 있다 생각하며 들었습니다.

https://youtu.be/PGZxAd1ae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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