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은 니스에 도착하기 전, 에즈와 모나코에 들렀다 가려했다.
하지만 니스 부근에서 차가 엄청 밀리고, 핸드폰 네비는 배터리가 방전돼 꺼지고, 차량 네비는 아주 작정한 듯 틀린 길로만 인도하는 바람에 또 엄청 헤매다가, 어두워질 무렵인 8시쯤 겨우 니스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가야 할 곳들을 못 갔으니 다음날 아침 일찍 서두르자고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든다.
피곤하고 긴 하루였다.
새 날은 니스 주변을 구경하는 날이다.
지친 상태로 늦게 잘 수밖에 없는 날들이 계속 됐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새로운 희망으로 또다시 반짝 거린다. 오늘 하루는 순조롭겠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사건이 생기곤 했다. 대개 네비의 상태가 순조롭지 않아 길에서 헤매는 일이었으므로 늘 시간에 쫓겨야 했다.
아침 일찍, 에즈로 향한다. 에즈 역시 산꼭대기에 위치한 고성 마을인데, 마을에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내려다 보이는 지중해의 풍광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저 푸른 바다를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혹시 내 눈빛도 에메랄드빛으로 물드는 건 아닐까?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을 돌 때마다 마치 숨어 있다 튀어나온 듯, 앙증맞은 작은
아뜰리에와 골목 사이로 보이는 바다와, 빨간 지붕.. 그리고 예쁜 상점들. 상점이라기보다는 간판이며, 입구를 장식한 조각품들이 마치 예술 작품들 같다.
상점 직원들도 출근 전인 이른 아침의 텅 빈 에즈 마을을 맘껏 누리고, 품어보는 게 좋아서
그 안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그레이스왕비의 나라 모나코와 생 폴 드방스와, 마티즈, 샤갈까지 만나야 하는 빡 센 일정. 서둘러야만 한다.
에즈 마을을 내려오니 바로 모나코인데 시원치 않은 두 개의 네비로 다니기에 모나코는 너무 복잡하다. 대부분의 길이 일방통행인 것 같은데 모르고 막무가내로 들어갔다가 후진, 깜짝 유 턴에, 심지어는 일방통행 터널까지 들어갔다가 혼비백산하여 후진해서 나오는 등, 말도 안 되는 불법 운전을 하며 헤맸다.
점은 찍었으니 모나코는 그만 포기하기로 한다. 프랑스와는 거의 터널로 이어졌는데 그나마 터널만 들어가면 아주 잠잠해지는 네비 때문에, 진땀 흘리다 무사히 모나코를 빠져나오자 모두 큰 숨이 절로 나온다.
생 폴 드방스로 가는 길에 네비 작동을 점검하느라 어떤 프랑스남성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이 분은 오토바이로 앞장서서 우리를 생 폴 까지 아주 데려다주신다.
프랑스사람들은 불친절하고, 영어도 못 하고, 소매치기가 많다고 블로거들이 하도 많이 이야기하기에 지레 겁을 먹었는데, 우리가 만난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너무 친절하고 서로 더듬거리니까 오히려 버벅 거리며 의사소통도 그런대로 했으며, 지독한 김치냄새 때문에 우리도 불쾌했던 우리 차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말 고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찾아간 적이 거의 없으니, 여행지에서의 예쁜 느낌은 금방 잊고, 오고 가는 길 위에서의 고생담만 더욱 생생하여, 행복한 여행이었다는 생각보다는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이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나는 알량한 가이드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할 것 같은 압박에 늘 시달려야 했다.
매일 새벽, 잠은 오지 않고 잠든 친구들 깨울까 봐 살금살금 들어간 화장실 변기 뚜껑 위에 앉아 가족 카톡을 통해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동안은 이 나이에 무서울 일이 무어냐며 한껏 거들먹거렸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가장들께 최상의 경의를 보내고 싶어졌다.
누구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제일 앞에 서서 믿고 따르는 이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그때야 비로소 느껴 봤다니, 우리 집 가장 덕에 참 편하게 살아왔음을,
또다시 감사했다.
생 폴 드방스는 16C에 세워진 전형적인 중세의 요새도시이다. 이번여행엔 유난히 산 위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도시들을 많이
다녔는데 아기자기한 작은 골목들을 걷다 보면 비슷해 보여도 나름 다른 개성이 있어 지루하지는 않다. 오랫동안 잘 보전해 온 돌계단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끼고, 예쁜 꽃들로 치장한 창가에 한 눈 팔며 설렁설렁 걷다 보니 샤갈과 이브 몽땅이 왜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곳도 예술가들이 작업하고 있는 아틀리에와 갤러리가 많이 있어 눈이 맘껏 호사를 누렸던 곳이다.
이곳 주차장 역시 곱게 통과하지 못한다.
주차장 출구 단말기에 신용카드를 넣었다가 뺀 뒤, 입구에서 받았던 티켓을 넣으면 정산이 되는데,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티켓이 자꾸 도로 나와서 , 뭔가 잘 못 됐다며 티켓을 들고 우왕좌왕
사무실 찾아 냅다 뛰어다녔다.
뒤에 차들은 밀려서 빵빵거리지,
비는 추적추적 내리지, 허둥대다가 경사 심한 언덕에서 미끄러지고.. 겨우 사무실을 찾아갔더니, 3초만 기다렸다 티켓을 넣으란다.
기계가 카드를 미처
인식하기 전에 바로 티켓을 넣으니, 자꾸 도로 나왔던 것.
뭐가 그리 급해서 3초를 기다리지 못 한 건지.
정말 그랬다. 거의 매일, 가는 곳마다 허둥대고, 서두르고, 쫓기 듯 불안했다.
눈 시린 쪽빛 바다를 보고,
오랫동안 잘 보존해 온 고풍스러운 마을들을 천천히 걸으면서도
밀린 숙제가 남아있는 듯 늘 편안하지 않았다.
어서 하루하루 무사히 보내고 다들 건강하게 인천공항에 도착한 후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은 몹쓸 불안함이었다.
니스에서 젤 가고 싶은 곳은 샤갈미술관이었는데, 근처에 도착하니 이미 폐관시간이라, 한 시간 관람이 가능했던 마티즈만 겨우 만날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가슴 쿵쾅거리며 느꼈던 샤갈의 그 몽롱한 색채에 또 한 번 빠져보고 싶었는데..
정말 안타깝다.
마티즈 미술관 앞에서, 괜한 폼 잡고 사진만 찍으며 놀다가 차는 숙소에 주차한 후 시내 구경에 나선다.
니스에서의 마지막 밤이었으므로, 니스 해변을 지나, 시내 중심인 마세나 광장으로 향한다. 니스의 사람들은 다 여기에 나와 있는 듯, 거리 레스토랑들은 활기가 넘치고, 각종 거리 공연에, 노점상, 호객꾼들로 아수라장이다.
모처럼 활기찬 거리에 있으니 비로소 여행 온 것 같아,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분수에 옷 젖는 줄 모르고, 풍선처럼 공중에 떠 있는 형형색색의 조형물들도 우리의 흥을 돋우어 준다.
거리 카페 중, 제일 붐비는 곳으로 들어가 인파에 섞여 앉아 와인과 샐러드, 피자등을 먹는다.
이번 여행 중 외식을 한 적이 별로 없었지만,
한 번도 실패 안 했을 정도로 음식들이 입에 잘 맞는다. 술이 살짝 들어가니 육순이 들은 다시 소녀가 되어, 70년대 히 식스의 '해변으로 가요'를 외치며 해변으로 직행.
흰 파도 부서지는 니스 밤바다에서
'조개껍질을 묶어' 그녀의 목에다 얼마나 걸어댔는지,
고래 잡겠다고 동해바다도 몇 번을 오갔는지. 파도소리와 내기라도 하듯, 노래인지 고함인지 모를 괴성을 마구 질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