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는 저녁식사를 정식으로(?) 하지 않는다. 장장 30년씩이나. 그래도 몸무게는 조금씩 계속 늘기만 한다. 애꿎은 유전자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밥만 안 먹었지 서너 시까지 간식을 몰래몰래 먹어치운 탓이 더 클는지도 모른다. 친언니들 조차 그렇게 안 먹는다는데 저렇게 꿋꿋하게 뚱뚱할 수 있냐며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평소 집에선 병태 저녁식사만 차려 준다. 여행지에서 맛있는 현지식을 먹고 싶어 하는 병태에게 혼자 다녀오라고
등 떠밀 때도 종종 있다. 둘이 들어가 한 그릇 주문하는 일은 나라 망신이라며 아무 데나 애국심을 들이댄다. 불쌍한 병태는 마트에서 사 온 밀키트나 식어빠진 치킨에 즉석밥을 종종 택한다.
오늘 밤은 샤모니의 마지막 밤. 트래킹 후, 축제 중인 거리로 나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흥청 거리기로 한다. 멋진 만찬 생각에 어젯밤부터 들뜬 병태는 영자가 골라낸 식당들의 메뉴를 침을 꼴닥이며 몇십 분째 골똘히 들여다봤다.
이럴 때 병태는 모처럼 진지하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차피 아래로 다 나오니 허기만 채우면 된다'는 아내를 만나 40여 년을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메뉴판의 불어가 번역까지 가능하니 참 좋은 세상이다.
마지막 트래킹보다 맛있는 저녁밥 생각으로 한껏 들뜬 병태와 발걸음도 가볍게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몽블랑 마지막 트래킹.
너무 가고 싶었던 몽드라삭스를 포기하고 나니 몽블랑 하이라이트 코스인 락블랑엔 꼭 가고 싶었다. 그동안 컨디션이 안 좋아 조심하여 무리하지 않게 걸었는데 이제 감기도 거의 나아서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일 숏 코스라는 프레제르에서 출발하기로 하고 힘차게 출~발.내 나라 버스처럼 편해진 샤모니 버스 타고 Plain des Praz에서 내린다.
케이블카 타고 프레제르로 올라가서 락블랑 이정표 따라 걷기 시작한다.
순하고 알흠다운 길, 작은 시냇물 위 나무다리를 건넌다. 물만 보이면 피라미라도 찾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병태의 해찰을 느긋하게 기다려 주며 천천히 걷는다.
구름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나는 몽블랑 산군들의 요염한 자태. 봉우리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랴 어차피 돌아서면 잊어버릴걸.
구름 속의 산책은 경이롭다. 취한 듯 빨려 들어가 허우적거리게 한다. 내 다리가 아닌 듯 가파른 경사도 평지 걷듯 편하다.
검은호수 쉬저리에 걸터앉아 호수멍도 때리고
숨 막힐 듯한 경치에 취해 룰루랄라 걷다가
소문이 자자했던 애들이 너희였구나
마중 나온 산양들을 만난다.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결코 쉬운 코스는 아닌 길을 가비얍게 걷다 보니 벌써 락블랑 호수라네 ㅋㅋ
호수는 아직 겨울이지만 아무러면 어떠랴 그앞에서 누구나 모델이 된다
락블랑 산장에서 따뜻한 커피와 핫 쵸코를 마신다. 이곳에선 그동안 다녀 본 산장 중 유일하게 현금만 받는다. 남은 동전 다 털어주고 배낭 짐 줄였다며 또 행복한 병태와 영자.
내려올 때도 사진찍기를 멈출수 없다.
내려오는 길엔 제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는 몽블랑
몽블랑을 한껏 들이키며 걷는다.
수고했다고 등 두드려주는 몽블랑과 맘껏 허그하며 이별 인사를 나눈다.
숙소에 돌아와 씻고 이쁜 옷으로 갈아입는다. 드디어 병태가 고대하던 우아한 식당에 가기로 한 날이다. 결정 장애 1급인 병태는 1순위로 정한 퓨전 아시안 식당의 메뉴 중 10가지쯤 골라내고, 무얼 먹을까 행복한 고민 중이다. 그런데 식당을 다시 점검하던 영자의 입에서 외마디 신음이 나온다.
"아이고 어쩌나! 둘이 가서 세 가지쯤 주문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 식당은 양이 워낙 작아서 당신이 고른 메뉴들이 거의 애피타이저 수준 이라네 둘이 메뉴 여섯 개를 먹었는데도 배고팠다는데?"
코로나 이후 세계적으로 물가가 올랐고 프랑스 역시 외식물가가 후덜덜 하다. 메뉴 여섯 개를 주문하고 와인이라도 곁들이면 거의 30만 원이다. 아무리 마지막 날 만찬이라도 한 끼에 30만 원을 쓰는 건 용납이 안된다.
"당신은 괜찮겠어? 난 용납이 안된다"
병태는 금방 울 것 같다. 은퇴 후 영자보다 더 짠돌이가 된 병태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2순위 식당, 퓨전 일식집은 가까우니 서둘러 숙소를 나선다. 거리는 축제 마지막 날을 맞아 한창때 명동의 인파 같다. 곳곳에서 울리는 음악소리에 맞춰 흔들거리며 찾아간 퓨전 일식집은 예약으로 꽉 찼다. 3순위 태국 식당은 손님이 한 팀도 없어 미덥지 않다. 4순위 돈가스 식당도 빈자리가 없다며 지하 별실로 안내한다.
그렇게 별렀던 샤모니 마지막 날 만찬은 쾌쾌한 냄새나는 지하의 창고 같은 간이 좌석에서 돈가스 이외의 유일한 메뉴, 커리로 정한다.
커리의 양이 너무 적어 추가한 왕대추 만한 김밥 6개를 나눠 먹고 6만 원을 지불하려니 속이 쓰리다. 거리로 나선 병태는 기어이 빵 두 개를 사 먹고 나서야 기분이 좋아진다.
마라톤 축제를 끝낸 거리는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으니 더욱 흥겹고 들떠있다. 흥청거리는 사람들 속에 섞이니 우아한 식사든, 커리에 꼬마김밥이든 이젠 아무 상관없다. 커다란 젤라토 하나씩 손에 들고 흔들흔들 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