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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희 Jan 05. 2024

병태 말고  병태엄마  그리고 동생

오늘부터 1일

태와는 사내커플이다. 수많은 남직원 중, 병태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건   같은 부서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많이 외향적인 것 같아도 상처받기 싫어 표현하는 걸 두려워했던 영자는 그때까지 짝사랑만  n번 중이었다.   


가까이서 관찰해 본 병태는 참으로 철없고 보기 드물게 순수해서 영자 프레임에 쉽게 들어오리라는 얄팍한 계산을 했던 것 같다.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둘은 퇴근 후,  각자  지하철 첫째 칸과 마지막 칸을  타고  종각에서 내린다.   당시 제일 유명한 광화문 맛집 당주당 냉면을 먹고 세종문화회관 뒤편 계단에 앉아 브라보콘 핥으며 노닥거리다가  덕수궁 돌담길을 설렁설렁  걸어 시청역까지  간다.


익산  출신 병태는 인천에서 하숙 중이고, 영자네 집은  청량리역에서 버스로 네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연립주택이다. 둘은 시청역에서 일호선 반대편 을 향해 헤어진다. 가끔 병태가 청량리까지 왔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그즈음   병태 집에선 오랜 하숙생활에 지친 병태를 위해  한 달에 한두 번 맞선을 주선하기 시작한다. 맞선을 위해 병태가 시골로 내려간 주말, 집으로 향하던 영자는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칠 정도로 심란한 자신을 보고  놀란다.


병태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잡아야겠다.


특별할 것 없던 어느 날,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같은  아이스 콘을 먹던 영자가 갑자기 생각난 듯  툭 던진다.

 "난 이제 나이도 있고 앞날을 같이 갈 수 있는 남자라야 계속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병태 씨 생각은 어때?"

별생각 없이 히히덕  대던  병태가 화들짝 놀란다

"뭐 ...뭐 .. 나도 같..은 생각이지  뭐."

"그렇다면 진도 나가자. 일단 울 오빠를 먼저 만나야 돼."


영자는 진도(?) 재빠르게 진행시킨다.

병태를 만나본 오빠는 영자가 아깝다 다.

모든 세상 오빠가 다 그런 말을 할 거라고 가볍게 넘긴다.  다음은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순서.

엄마는 눈딱지를 보니 처자식 굶기지는 않겠다  하시고 아버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하셨다.


이제 병태네 가족 차례다.  아버님은 돌아가신 후라 당연히 일 먼저 어머님이  며느리감을 보러 오실 줄 알았는데 첫 번째 순서가 아주버님이다. 아주버님은 그동안 맞선녀 중 제일 마음에 든다고 후한 점수를 주신다.


 다음 차례는 작은 아버님이란다.   두루마리를 입고 오신 작은아버님은  취조하듯 영자를 살피신다.  비빌 언덕 없는 집안에 볼따구니에 살이 없어 복 안 붙겠다고 대놓고 반대하신다.


어머니는 언제 오셔? 어머니가 제일  중요한 분 아니신가?

어머니는 농사철이라 못 오셔.

....


어머니 생신은 언제야?

계절이라도?

봄? 여름? 가을?

..  몰라.

이건 뭐지? 어머니는 어디 계신 거지?



작은아버님보다 아주버님의 의견이 우세했던지 어머니를 배제한 채 결혼식은 쉽게 진행되었다. 결혼식 날짜를 받은 후에 병태집에 내려갔다. 고속버스 3시간  반+택시 15분 거리의  먼 길.  병태가 나고 자란 회복부락이다.


마침 타작날이라 넓은  마당이 어수선하다.

뽀얀 먼지 사이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와 검불을 뒤집어쓴 여인이 불쑥 나타나신다.

드라마 속  촌부의 모습 그대로다.

에이, 엄마 세수하고 머리도 좀 빗고 옷이나  갈아입지.

병태가 짜증을 낸다.

영자는 최대한 공손히 인사드린다.


하던 일 마쳐야 해서 절은 안 받으시겠다는 어머니를 안방으로 모시고 절을 올린다.

커다란 가마솥이 세 개나 달린 부엌은  예비며느리를 맞이하느라 분주하고 방문밖엔 서울각시  구경온 동네사람들이 가득하다.


집안 살림은 맏며느리 몫인지 두 상 가득 차려놓은 화려한 밥상 앞에서 뭘 먹었는지 모르게 허둥댄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낯설고 수많은  시선 속에서 예약해 놓은 돌아갈 버스 시간은 너무나 까마득하다.


"병태야 야랑  ~~ 데부뚝에나 댕겨올텨?"

어머님은 영자를 세심하게 보고 계셨고 이쁘게 보신 것이 틀림없다. 선뜻 구원병으로 나서신다

게다가 수많은 신발들 중 어떻게 아셨는지 영자 구두를 찾아내어 주춧돌 위에  기 편하게 돌려놓아 주신다.


죽을 때까지 간직해야 할 어머니의 마음이고,  감동이었다.  평생 이 순간만 잡고 살리라.

그때 스스로에게 다짐한 약속을 영자는  잊지 않고 있다.


또 한 번 있다.

어머님은 무엇보다 병태에게 아들자식을 원하셨다.  그 당시의 아들의  존재란 걸 요즘 사람들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4남 5녀  중 둘째 아들인 병태.  자식 중 유일하게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보내 공부시킬 만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병태라 더 그러셨는지 모르겠다.  장남에게 아들 셋이 있었고, 셋째 아들에게도 아들 둘이 있지만 유독 둘째 병태의 아들을 원하셨다.  


두 번째 딸을 낳았을 때 영자는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잠깐 들었었다. 하지만 억지로 되는 일은 아니고 셋째를 가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농사일  때문에 예비 며느리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아들 결혼 시켰던  어머님은 산후조리를 해주신다며 며칠 전부터  시누이와 함께 우리집에  와 계셨다.  바로 옆에 친정엄마가 살고 계셨지만  첫 출산에 이어 두 번 째도 40일은 쉬어야 산모가 건강하다고   올라오셨다. 정작 어머니는 열 번의 출산 후, 열 번 모두 사흘 만에  밭으로 나갔다고 하셨다.


병원에 심부름 온 시누이에게 힘주어 말했다.

"어머님께 전해드려. 정말 죄송하지만 병태에게서 더 이상의  자식은 기대하시지 말라고. 아들은 못 안겨 드리지만 다른 효도로 갚겠다고."  당돌한 며느리의 선언에 어머님은 많이 아프셨을 것이다.


퇴원하는 날, 복도식 아파트 끝이던 문이 벌컥 열리고 어머님이 뛰어오신다.  어머니님은  앞 서 걷던 병태와 아기를 잠깐 보시고 뒤에 오는 영자를 힘 있게 안아주신다.

수고 많았다, 고생 많았다며

한없이 어깨를 토닥여주신다.

그때 영자의 눈에 들어온 어머니의 맨발.


다시 한번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 깊숙이

밀어 새겨놓는다.

그 후에도 어머니께 받은 감동은 수없이 많았지만 두 개의 기억이면 충분했다.

철없는  병태가 가끔 말썽을 부려도  그 기억으로 바꿀 수 있을 만큼 그분의  사랑은  차고 넘쳤다.





이제  어머니는  아흔여덟 살이시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죽을 때 너무 갑자기 죽으면 자식들이  놀랄 테니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딱 사흘만 앓다 죽으면 좋겠다고.

평생 착하고 성실하게 사셨으니 그 소원은 꼭 들어주실 거예요.. 돌아가시는 복은 주실 거예요


어머니는 5년쯤 전부터 치매증상을 보이셨다.

한결같이 이뻐해 주시던 병태 각시도 이젠 못 알아보신다.  땀으로 젖은 저고리를 벗어 비틀어 짜내고 다시 입으며 지으셨다는 시골집을 떠나 시내 작은 아파트로 옮기셨다.  미혼으로 늙어버린 예순  안팎의  막내아들, 막내딸과 함께 살고 계신다.  


아들 넷이지만 남은 며느리는 영자가 유일하다.

아니, 영자도 어머니 곁에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전 살 때는 그나마 가끔 갔었는데, 양평으로 이사한 뒤엔 오롯이 막내 시누이만 믿는다며  일 년에 몇 번  못 가고 있다.

물리적 거리, 도로 정체 운운하며 옹색한 핑계대기 바쁘다.  


며칠 전 어머님 생신 날, 모처럼  모인 가족들은 식사하러 나가시고 어머니랑 둘만 남았다.

부서질 것 같은 어머니를 가만히 안고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지키겠다던 다짐과 약속은 지금 어디에 있나. 어머니 등을 토닥이며 눈물을 흘리는데 어머니도 함께 토닥여 주신다.


몇 달 전  왔을 때는 눈감고 누워만 계시더니 나를 안아주시는 어머니 손길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진심으로 어머님이 주님을 영접하고 영혼이 구원받기를 빌었다.

이 짧은 기도로  용서받을 수 있을까?

어머님과 시누이에 대한 죄의식을 털어버릴 수 있을까? 매달 보내드리는 돈 몇 푼으로 시누이의 짓눌린 어깨를 외면해도 될까?


이젠 어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는 천국의 문을 열 수 있으실 것이다.

항상 그러하셨듯 길고 간절한 기도에 주님은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십여 년을 사랑으로 돌보던 어머니가   떠나신 후  많이 힘들어할  남은  시누이를 토닥이고 달래줘야 한다.


살면서 만나본 사람 중 제일 선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두 사람, 어머니와 시누이. 그런 분들이 가족이라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오늘은 어머니를 꼭 닮은  시누이에 대한 고마움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기로 정한 날.


오늘부터   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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