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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희 Dec 05. 2023

끝맺을 준비

늘 그랬듯이 미리미리

문득 유서를 써 봤다.

딸들에 대한  걱정거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내 손을 떠나 가정을 잘 꾸리고 있으니.   

그 애들에겐 남편과 자식이 찰싹 붙어있고 흐르는 강물처럼   모난 돌 다듬어 가면서  '감사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


문제는 병태다. 언제나 내 글 속의 주인공 병태.

집  마당에 나갈 옷조차 꺼내 주어야 하는 남편.

70 평생 요리라고는 타이머 맞추고  라면 하나 겨우 끓이는 내 남편. 혼수 준비할 때부터   다리 셋 달린 식탁을 사도 암말 안 할 테니 데리고 다니지 말아 달라던 새 신랑. 집을 사고파는 일부터, 못 박는 일까지 나 혼자 해치우기를 원했던

 그 남자 병태.

 

내가 먼저 떠난다면, 젊지도 않고  돈도 별로 없는 병태에게 와 줄 할매는 없을 것 같은데ᆢ

그때부터였다.


정리를 해놓아야 하겠구나.

늙은 영감 혼자 살기엔  너무 휑할 시골집.

미니멀을 외치며 살았다지만 여전히 잡다한 구석구석의 짐.  사포질과 칠하기로 오래 버텨 준 낡은 가구들까지.


성격테스트를 해보니 -수호자형-이란  결과가  나온다.     좋네.

기꺼이 수호자가 되기로 한다.

영혼까지 갈아 넣을 정도는 아니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이 집을 팔기로 한다. 아직 부동산에 내놓지는 않았지만 그럴 계획이다.


모든 계획은 집 팔기부터 시작한다.

집을 팔고 힘닿을 때까지 작은 아파트 전세 살다가 빠르면 5년, 늦으면 10년 후엔 예산에 맞는 실버타운으로 옮겨 노후를 지내기로 한다. 그곳에서 이 생을 끝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자식들이 신경 쓰지 않게 편하게 살다가  병태보다 앞서 간다 해도 그런대로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무언가 마음먹고 계획하면 거의 그대로 살아졌다.  

5년 전까지는 내가 잘나서 그렇게 됐다고 마음껏 거만했었다. 지켜주는 거대한 힘이 항상 지켜주신다면서..


5년 전, 신은  너무 오만한 나를 치셨다.

아니 나를 치시면 좋았을 것을 하필 가족 중 제일 약한 생명체 내 어린 손녀를 통하셨다.

수많은 줄에 의지한  중환자실 아기를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데려가실까 봐  얼마나 울며 매달렸던지..


주님은 '기적'을 내려 주셨고 우리 아기는 건강하고 너무나 사랑스럽게 잘 자라 내년엔 초등학생이 된다. 축복 같은 우리 막내 손녀를 보면서 비로소 어렴풋이 깨달아  간다.  그분 앞의 나란 존재가 얼마나 작고 여린 지.  그런 분이 바로 곁에서 항상 지켜주심을 믿으니 이젠 더욱 힘이 생긴다.


그러므로 나의 야심 찬 마지막 계획은 무리 없이 진행될 것이다. 항상  십 년 후 계획을 세웠었는데 이제  이 끝맺음의 준비를 시작하려고 하니  참으로 마음이  편안하다.

어느새 마칠 때까지의 계획을 세울 수 있음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 시간이 얼마나 허락될지 그분이 정해주시겠지만 그 시간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될 테니...



또다시 나는 부러울 것 없는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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