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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May 21. 2020

현세에 강림한 디지털 시대의 신

PC게임 <와치독>


  “형, 이거 형 아니지?”

  회사 동기로부터 뜬금없는 전화가 한 통 왔다. 편하게 통화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 평일 대낮에 대뜸 걸려온 전화라 의아했다.

  “응? 무슨 소리야, 나 지금 여의도에서 인터뷰하고 있는데… 나한테 건 거 맞아?”

  “그치? 아닐 줄 알았어. 근데 형도 라인 써? 아무튼 지금 형 라인에 들어가 봐. 난리 났어.”

  카카오톡이 평정한 모바일 세상에 대한 작은 저항이자 일본인 친구들과의 연락도 수월하게 할 겸 ‘라인’ 어플을 설치한 2013년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일상적으로 매일 쓰던 게 아니라서 오랜만에 라인 앱을 실행하자 대화중인 방 목록이 주욱 나열됐다. 이미 수십 개가 넘는 대화방이 생긴 상태였다. 처음 보는 신기한 장면에 현실감이 좀 없어서 무슨 만우절 이벤트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나한테 제보전화를 건 동기 녀석과 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방에 들어갔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대화방에 내가 들어갔는데도 방 외관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즉 3명이 들어와 있는 상태인데 대화는 두 이름으로만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대로, 급하게 접촉사고가 좀 나서 그러는데 딱 50만 원만 지금 입금해줄 수 있냐?”

  대충 이런 맥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대화방에 있는 동기는 나랑 통화를 한 후라서 상대가 해킹범이라고 확신해서인지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래 뭐, 일단 이 방은 괜찮겠다. 그런데 나머지 방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모든 방의 대사는 [Ctrl+C -> Ctrl+V] 를 하듯 똑같았다. 그 와중에 꼼꼼하게도 반말 버전과 존댓말 버전 두 가지를 준비해 상대의 직급에 맞춰 말을 거는 치밀함마저 보였다. 다급하게 한 대화방씩 들어가 상황을 설명했다. ‘계정을 해킹당해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니 입금 요구나 금전 관련 요청은 무시하십시오’ 정도의 해명을 [복사 -> 붙여넣기] 로 맞대응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컴퓨터를 이용해 작업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빠른 속도인 것에 비해, 여의도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 스마트폰과 두 손가락만 이용하는 나로서는 기민한 대처가 쉽지 않았다. 이쪽의 대응보다 범인이 새 방을 파고 새 사람에게 접촉사고 운운하는 뻐꾸기를 날리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따라잡기가 힘들어지자 합리화 내지는 정신승리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삭막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상식적인 범죄 인식률과 대처법을 믿어 보기로.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이렇게 뻔한 수작에 낚이겠어? 보이스 피싱, 스미싱, 파밍, 금감원 사칭 이런 게 뉴스에 얼마나 많이 나왔는데. 두메산골 할아버지도 아니고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성인 남녀 중에 이런 어설픈 말에 돈 입금하는 사람은 없겠지…’ 라며 살펴보던 중 뜨악한 메시지를 발견했다.


  “어? 선배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접촉사고 때문에 50만 원이요? 에구, 몸은 괜찮으세요? 지금은 바깥이라서 좀 힘든데 두 시간쯤 후에 집에 들어가자마자 부쳐드릴게요 ㅎㅎ”

  이게 뭐야! 이런 수법에 진짜 넘어간다고?! 이건 순수한 건지 착한 건지 걱정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아무 의심 없이 돈을 보내주겠다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게 내가 인생을 마냥 헛살지는 않았구나… 라는 어떤 증명이 아닌가 싶어 살짝 기쁘기도 하고.



  그나마 주변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까지는 괜찮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혹시나 싶어 번호만 저장해두었던 회사의 각종 국장, 사장, 아나운서, PD들에게까지 50만 원 (직급에 따라 100만 원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운운하는 것도… 까짓것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런데 차마 지울 수 없어서 연락처만 보관하고 있던 옛 여자 친구, 서로 간만 보다가 애틋하게 헤어진 썸녀, 결혼하여 모든 걸 잊고 먼 나라로 이민 가버린 그녀,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가슴 아프게 뒤돌아섰던 인연 등…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연락할 리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그녀들에게까지 저 메시지가 발송된 걸 포착했다.


  차라리 밤 1시에 보내는 ‘…자니? 잘 지내?’ 가 낫겠다. 잘난 듯 헤어져놓고 5년 만에 연락해서는 갑자기 접촉사고가 났으니 50만 원만 입금해달라니, 도대체 날 얼마나 쓰레기로 볼지 상상조차 안 된다. 이 수치심… 이쯤 됐을 때는 진심으로 해킹범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고 싶었다.

  “선생님, 이제 그만 하시죠. 제가 그냥 한 200만 원 보내드릴 테니 연락처 아래쪽에 있는 여자들한테는 라인 보내지 말아 주세요.”

  진심 이렇게 연락하고 싶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그만하세요 해커 선생님.    

    



  2014년에 발매된 유비소프트의 <와치독>은 게임 매체에서는 보기 드물게 ‘해킹’을 주된 모티브로 삼은 오픈월드 게임이다. 해커인 주인공 에이든 피어스는 여러 회사의 자료나 개인정보, 금전 등을 소소하게 해킹하던 중 정치권과 마피아가 연루된 아주 민감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고 그로 인한 보복으로 자동차 사고를 당해 본인은 무사했지만 함께 탄 조카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누가 한 짓인지 배후를 밝히기 위한 복수의 여정을 걷는 고독한 남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게임, <와치독>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미국 시카고는 도시의 모든 기반시설이 ctOS라는 소프트웨어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교통, 통신, 보안, 미디어는 물론 개인의 사적인 영역까지 철저하게 다뤄지고 있기에 시민 사회단체 등에서는 ctOS가 국민을 감시하고 개인정보를 기업에 팔아넘길 위험성이 다분하다며 반대하지만 정부와 ctOS 제작사는 절대 그럴 일 없고 오로지 시민의 공익을 위해서만 쓰이는 안전한 공공 시스템이라 해명한다.


  바로 이 시스템을 주인공 에이든은 스마트폰 하나로 해킹해버린다. 그렇기에 게임 상에서 에이든은 그야말로 신이다. 창조주와 다를 게 없는 전능을 갖게 된다. 한밤중 수십 명의 경찰에게 뒤쫓기는 위급한 순간, 해킹을 통해 반경 수백 미터 안을 정전으로 블랙아웃 시켜버린다. “어둠이 있으라” 한 마디에 온 세상이 암흑에 휩싸이는 것이다. 가로등, 가게 조명, 도로 신호등, 간판… 모든 불빛이 사라진 도심, 주인공은 혼란스러워하는 경찰들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온다. 그리곤 다시 한 마디 한다. “빛이 있으라” 이윽고 다시 밝아지는 도시.


  ‘온갖 비밀과 거짓말들이 데이터의 구름 속을 유유히 떠다니지. 손을 뻗어서 낚아채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거야’ 라는 게임 상의 대사처럼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어떤 것이든 가질 수 있는 ‘현대판 마법사’ 들의 이야기. 게임상에서 에이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시내를 걷기만 해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너무나도 많은 걸 알 수 있다. 옆에 걸어가는 아저씨, 아줌마, 학생의 개인정보가 바로바로 프로파일링 되어 손에 쥔 스마트폰에 나타나는 것이다.


  난독증 환자 [식료품 포장] $21,100

  온라인에서 자주 ‘자살’ 검색 [소방관] $46,200

  자식이 살해당함 [손해사정사] $61,800

  포털뉴스 정치기사 악플러 [법률비서] $54,300

  라텍스 알레르기 [텔레마케터] $17,900  

  테니스강습 받는 중 [심장병동 원장] $104,200


  이름과 나이는 물론 최근의 관심사, 건강상의 특징, 은밀한 취향, 인터넷 검색 이력, 직업, 연봉 등 모든 걸 알 수 있다. 통화 중인 사람의 대화를 멀리서 감청할 수도 있고 문자와 메신저의 내용도 훔쳐볼 수 있다. 사무실의 CCTV도 훔쳐보고, 방안에 놓인 노트북의 화상캠을 이용해 침실도 엿볼 수 있다. 탁자에 놓은 핸드폰 마이크로 통화 중이 아닌 사람끼리의 대화도 엿들을 수 있고 은행계좌 해킹으로 ATM기에서 현금 인출, 차량 공유 어플을 해킹해 승용차도 손에 넣는다. 그야말로 절대자, 이 땅의 중생들을 긍휼히 지켜보려 80억 개의 눈을 부릅뜬 감시의 신께서 현세에 강림하셨도다.



  화려한 특수효과의 대규모 블랙아웃이나 헬기 폭파, 건물 변압기-배선함 폭발, 열차 운행 해킹, 신호등 해킹으로 수십 대의 차량이 뒤엉키는 블록버스터급 교통사고 같이 쾅쾅 터지는 시원한 연출이 아무래 예고편에도 주로 쓰이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명장면이겠지만… 이런 ‘마이클 베이’스러운 연출보다는 한 명 한 명의 사생활이 낱낱이 드러나는 일상의 순간들이 훨씬 무섭고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물론 게임 속이니 가능한 허용과 과장이 대부분인 건 맞다. 현대사회의 모든 인프라가 단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될 리도 없고 국가기간시설이 한 명의 해커에게 이렇게 쉽게 뚫릴 리 만무하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0%는 아니지 않은가.

  지금도 국가기관들은 해킹을 당하고 있고 어이없는 시스템상의 오류로 원자력발전소가 멈추는 사고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개인정보는 더 이상 개인만의 정보가 아니다. 나와 당신의 주민등록번호가 중국 심양의 허름한 PC방 하드디스크 안에 담겨있다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게임 안에서는 ctOS를 통해 입수된 정보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악용된다. 개인의 건강정보는 고스란히 보험회사에 팔려 보험가입을 원하는 소비자가 지병으로 인해 보험금을 많이 탈것이라 판단되면 가입이 거부된다. 주가 조작이나 여론 공작 정도는 예사고 범죄율이 높은 빈민촌은 따로 총기발포 허가지역으로 묶어서 인권은 철저히 무시한 채 살벌하게 관리받도록 만든다.


  이 작품의 내용을 그저 픽션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실제로 기업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불치병의 신생아가 고사리 손을 내밀어도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싸늘하게 자리를 뜬다. 보험금을 주지 않기 위해 사고로 부모를 잃은 소년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하고, 근무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직원들에 대한 미행과 뒷조사, 협박은 픽션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에이든 피어스는 천신만고 끝에 결국 뜻을 이룬다. 자기가 해킹을 하다가 어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지, 그 때문에 누가 어떤 곤경에 처했고 그로 인한 보복을 당했는지, 누가 소중한 조카를 죽게 만들었는지… 모든 걸 알게 되고 악당들에 대한 보복도 힘겹게 매조지한다.

  상처뿐인 복수의 끝. 스토리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거의 영화 <어벤저스> 급으로 도시 이곳저곳이 터지고 도륙 난다. 헬기는 추락하고 건물과 도로는 폭발하며 사상자도 어마어마하게 발생하는데 ctOS를 만든 회사의 홍보담당자는 이에 대한 논평을 이렇게 남긴다.


  “ctOS가 실력과 기술을 겸비한 해커들의 표적이 될 거라는 사실은 늘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공격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스템이 얼마나 강력한지 반증할 수 있었고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저희의 보안 방화벽은 최악의 공격도 견뎌냈고 여러분의 개인정보는, 안전합니다.”


  에이든의 스마트폰 하나에 도시 대부분의 시설이 쑥대밭이 됐는데도 동문서답과 자화자찬으로 점철된 ctOS 측의 자평은 작금의 시대상을 참으로 예리하게 묘사한 부분이다.


  타인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무서움. 컨트롤되지 못하는 전지전능의 위험성. 정부의 권력은 어디까지가 적당한지, 미래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한 학기 동안 토론해도 답이 안 나올 여러 담론들을 조화롭게 담아 한 편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처럼 잘 버무려 낸 작품 <와치독>. 라인 메신저 해킹 한 방에 점잖았던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이버 세상에 이미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우리들로서는 한 번쯤 음미해볼 만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에이든의 스마트폰으로 나를 프로파일링 한다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가 꽤 궁금해졌다. 대충 이 정도쯤 되지 않으려나?


  좋은 글을 쓰겠다는 헛된 꿈을 매일 꿈 [촬영기자] $37,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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