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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May 19. 2020

아름답고 이기적인 사랑의 힘

PS3게임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에 모인 기자들은 난감해졌다. 배포된 보도자료만 놓고 보면 ‘취업이 힘든 대학생이 학내 전산시스템에 침입해 해킹으로 성적을 올린’ 상당히 자극적인 내용이었다. 극심한 청년실업의 시대상을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신문사, 방송국, 통신사 기자들은 비좁은 사이버범죄수사대 사무실 안에 빼곡히 들어찼다. 그런데 경찰의 설명을 듣다 보니 미디어가 기대한 내용과는 조금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


  범죄자 인권이 지금만큼 중시되지는 않던 2009년인지라 해킹 피의자인 청년은 고개를 숙인 채 사무실 구석에 앉아 기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허여멀끔한 얼굴에 단정한 머리를 한 27살의 남학생,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지극히 평범한 공대생의 모습이었다. 사이버범죄수사대장의 브리핑이 시작됐고 범죄 내용과 검거 경위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해킹으로 학점을 조작해야 할 정도로 피의자의 성적이 많이 안 좋았나요?”

  “아닙니다. 아주 우수해서 컴퓨터공학과 조교로 일하는 대학원생입니다. 성적은 상당히 좋습니다.”

  “…?”

  “본인이 아니라 친구와 후배 총 4명의 성적을 조작해줬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어떤 대가나 금전을 받은 건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금품이나 향응 수수 사실은 일절 없습니다.”

  “……?!”


  정리해보면 이렇다. 서울 소재 명문대 컴공과 조교인 이 남학생에겐 평소 흠모하는 A라는 여자 후배가 있었다. 곧 졸업을 앞둔 22살의 후배 여학생을 좋아하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한다. 그러던 중 공무원 시험 준비 때문에 학점이 엉망으로 나와 걱정이라는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뭔가를 해주고자 마음먹는다.


  결국 패킷 조작을 통해 학내 전산시스템에 침입해 그녀의 지난 학기 성적표 속 F학점 4과목을 모조리 A로 바꿔놓는 데 성공한다. 어떤 일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렵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조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학생은 베프와 친한 후배 2~3명의 성적도 조금씩 올려줬고, 이렇게 꼬리가 길어지다 결국 붙잡히게 된 것이다.


  이건 범죄다. 대학 성적이라는 건 취업, 유학, 졸업, 장학금 등의 지표가 되는 만큼 공정하게 경쟁하고 엄격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친구가 본인의 이익을 위해 한 행동은 쥐꼬리만큼도 없고 좋아하는… 더 정확히는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위해 위험과 불이익을 무릅썼다는 점이 애매한 포인트였다. 이런 경우에는 도대체 기사의 맥락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사랑에 눈멀어 여후배 성적 조작한 대학원 순정남 체포!> 무슨 주말 타블로이드 신문도 아니고 이렇게 쓸 수는 없는 거잖아.


  기자들 중 대표를 정해 A여학생의 전화 인터뷰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차분히 사건 경위를 묻자 A학생은 역정을 내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 기자님, 이건 오히려 제가 피해자라니까요? 내가 언제 성적 올려달라고 했나요? 난 그런 적 없어요! 그 조교 오빠가 멋대로 고치는 바람에 저까지 지금 조사받고 있다구요. 이것 때문에 나 취업 안 되면 어떡해 진짜.”

  “네 학생, 그런데 학생이 입건된 조교한테 성적 고민을 털어놓은 건 맞지요? 그 말을 듣고 조교가 어떻게든 해준다고 했을 때도 말리지 않고 그러라고 했잖아요?”

  “그건… 뭘 하겠다는 건지 몰랐으니까 그렇죠. 성적 조작같은 걸 할 줄은 몰랐다구요.”

  “나쁜 성적이 고민이라는 사람한테 ‘내가 뭔가를 해주겠다’는 말에 성적을 고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는 건가요? 뭐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그럼?”

  “그… 그건 저도 잘…”


  여학생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오히려 피의자 남학생이 인터뷰 중인 기자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냥 좋아서 한 거예요. A는 아무 잘못 없고 아무것도 몰라요. 다 제가 한 겁니다. A인터뷰는 그 정도로만 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이쯤 되자 기자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지경이었다. ‘이건 뭐 완전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잖아?’


  사랑일까 집착일까.

  파괴를 동반한 사랑이란 이 얼마나 무서운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아래에는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국의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의 평범한 소녀 맥스. 그녀는 우연히 재회한 소꿉친구 클로이를 위기에서 구하는 도중에 자기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주변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고 행방불명된 친구를 되찾기 위한 시간 여행자의 모험이 시작된다.



  2015년 발매된 어드벤처 게임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처음에는 전형적인 ‘시간 여행’을 다룬 작품이라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려 상대방의 입맛에 꼭 맞는 얘기와 행동으로 호감을 얻는다거나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도 하고 일진에게 괴롭힘 당하는 친구는 위기에서 멋지게 구해낸다. 전형적인 미국 하이틴 무비다운 이런 내용들이야말로 타임워프의 건강하고 적절한 사용법임에 틀림없긴 하다.


  하지만 내용을 좀 더 진행하다 보니 시간 이동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본질적으로는 ‘사진’에 대한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사진을 좋아한 맥스는 고등학교에서도 사진 전공 수업을 들으며 공모전 준비에 열심이다.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주변의 소소한 일상 풍경에 자기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촬영한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직은 서툰 내성적인 사춘기 소녀에게 사진은 솔직하면서도 유일한 자기표현인 것이다.


  맥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이용해 대상을 찍는다. 한 번에 딱 한 장, 지극히 소중하게. 여러 장 찍고 결과를 확인한 다음 마음에 안 들면 곧바로 삭제해버리는 디지털 시대를 고스란히 역행한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마음까지 오롯이 담아 촬영한다. 이런 촬영 스타일은 맥스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여러 사람에게 관심을 골고루 나눠주거나 모두 같이 두루뭉술 잘 지내는 사교성과는 거리가 먼 그녀. 진정한 내 사람,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에게만 진하고 깊게 다가간다.



  그러다 스토리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갈수록 이 작품이 가장 하고 싶었던 얘기는 결국 ‘사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고등학생인 만큼 아직 미숙하고 투박하긴 해도 모두 다 사랑을 원한다. 주고 싶어 하고 받고 싶어 한다. 가족이나 주변 인물, 교사들도 결국엔 모두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사랑의 농도나 표현이 비뚤어져서 문제를 일으키는 캐릭터들도 등장하지만 결국 갈구하는 건 누군가의 따스한 애정인 것이다.


  맥스와 클로이, 두 여학생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자각조차 못하고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달빛이 쏟아지는 밤, 학교 수영장에 몰래 들어가 둘이 함께 헤엄치면서 추억과 고민을 속삭이고, 핸드폰 바탕화면 사진이 자기가 아니라는 걸 발견하면 순식간에 토라진다. 둘만 있을 때 걸려온 다른 친구의 전화는 받지 말라고 다그치고, 친구를 위협하는 불량배를 향해 눈 질끈 감고 권총까지 발사할 수 있는 사이.

  이건 누가 봐도 사랑, 그것도 아주 짙은 사랑이다. 가진 것도, 기댈 곳도 없는 서로에게 안식처이자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랑. 이런 맥스의 심정은 그녀의 일기장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클로이는 내게 베스트 프렌드 그 이상의 존재야, 하지만 걔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잖아

  나보고 키스해 보라고 해서 하긴 했지만, 진짜 했더니 놀란 것 같았어

  물론 나도 놀랐지, 하지만 조금도 후회하진 않아

  이건 우정의 힘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Chloe is more than my best friend, but who knows how she really sees me?

  She did dare me to kiss her, but she seemed surprised that I actually did.

  I am too, but I don't regret it for a second.

  Is that the power of friendship… or love?


  상대를 향한 절절한 마음이 아직은 낯설기만 한 사춘기 소녀 맥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풋풋한 하이틴 로맨스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무수히 많은 선택지와 그에 따른 결과들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쥐어짜는 순간이 곧 찾아오기 때문이다.


  클로이에게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아픔이 있다. 그녀의 상실감을 너무나 잘 아는 맥스는 시간이동 능력을 평소보다 과하게 사용해 클로이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몇 년 전 그 날로 돌아간다. 차 열쇠를 고장 내 운전 자체를 못하게 만들어 아버지를 살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 맥스. 기쁜 마음으로 클로이네 집으로 달려가면 건강한 모습의 아버지가 반갑게 맞아주고 이내 사랑하는 그녀가 눈앞에 나타난다. 전동 휠체어를 탄 채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는 힘겨운 모습으로.


  아버지가 살아있는 평행세계의 클로이는 부모님께 선물 받은 차를 운전하다가 큰 사고를 당한다. 척추 골절로 인한 전신마비. 죄책감과 충격에 망연자실한 맥스지만 억지로 기운을 내 클로이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며 많은 얘기를 나눈다.

  하룻밤을 사이좋게 곁에서 보낸 다음날 아침, 클로이는 맥스에게 부탁한다. 자기의 몸은 점점 더 망가지고 있고 결말이 뻔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부모님의 돈을 퍼부어가며 고통의 시간만 연장하고 있다. 어제오늘 맥스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을 생의 마지막 기억으로 간직한 채 떠나고 싶으니 여기서 나의 삶을 끝내 달라.



  안락사를 언급하는 클로이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어디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 진정 상대를 위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가슴이 무너져 내리지만 어느 쪽으로든 결정은 내려진다. 선택 후 맥스는 다시 과거로 떠나 이번에는 클로이 아버지의 죽음을 막지 않는다. 그 대가로 성큼성큼 걸어 다니는 클로이와 재회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맥스를 바라보는 안타까움이란…


  하지만 플레이어들을 잔뜩 괴롭힌 이런 선택은 어디까지나 워밍업이었다. 게임의 최종국면에 접어들면 맥스는 더욱 큰 결심을 해야 한다. 계속된 시간여행으로 과거를 이리저리 바꿔놓는 바람에 맥스와 클로이가 사는 마을 아카디아에는 자연재해가 몰려온다. 수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거대한 토네이도다. 맥스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클로이를 희생하든지 아니면 클로이를 선택해 애꿎은 수천 명 시민들의 목숨을 태풍 속으로 던져 넣든지.



  잔인한 양자택일. 어느 쪽이든 말도 안 되게 아픈 결정이지만 그래도 한쪽을 골라야 한다. 두 선택지를 양팔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한다면 한가운데 있는 눈금에는 ‘Love’ 라고 쓰여 있겠지. 판단의 바로미터는 사랑. 맥스는 클로이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 사랑이 수천 명의 목숨보다 가치 있는가. 그렇게 해서 클로이를 선택한다면 수천 명을 사라지게 한 죄책감을 그들은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 맥스에게 클로이는 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무엇을 선택하든 간에, 난 네가 옳은 결정을 할 거라 믿어.”

  “No matter what you choose, I know you made the right decision.”


  사랑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묻는 작품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지독하리만치 무섭고 이기적인 사랑.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보면 심각할 정도로 순수하고 바보 같은 사랑.

  어느 쪽을 고르던 아름답고도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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