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모단 May 18. 2020

우리가 알던 세상의 끝

PC게임 <폴아웃3>


  시간이 촉박했다.

  밤 9시에 시작하는 메인뉴스 중에서도 꽤 앞쪽에 배치된 아이템이었다. 방송사고를 막으려면 아무리 못해도 8시 50분까지는 현장에서 취재하고 촬영한 내용을 서울로 보내야 했다. 눈앞에 펼쳐진 대참사 앞에 조금 더 생생한 화면을 담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 보니 시간이 꽤 지체됐고 그만큼 서울로 송출하기에 타이트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2016년 4월 16일 일본 구마모토. 이틀 전의 지진에 이어 2차로 온 지진은 M7.3에 달할 정도로 강력했다. 이미 1차 지진의 타격으로 건축물들이 약해져 있었던 데다가,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된 거라 판단하고 대피소에서 집으로 돌아간 마을 사람들은 밤 1시에 급습한 강진에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동일본대지진으로부터 5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거대한 지진이 발생하자 회사는 새벽부터 전화를 돌려 출장 명령을 내렸다. 일본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선발된 나, 며칠 전 신혼여행을 다녀왔기에 국제운전면허증이 있다는 이유로 선발된 취재기자, 파이팅 넘치는 오디오맨, 이렇게 3명의 팀으로 곧장 후쿠오카로 향했다. 사전 준비가 아무것도 안 된 상태이기에 현지에서 빌린 렌터카로 하루 종일 달려 가장 피해가 심한 지역인 쿠마모토의 마시키마치에 도착한 시각이 저녁 7시. 초봄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보가 전혀 없어 일단은 구청(益城町役場)으로 향했다. 작은 시골 마을인지라 길은 좁은데 방송국, 병원, 관공서 차량, 자위대 장갑차에다가 피난을 떠나려는 주민들의 차량마저 뒤엉켜 도로는 통과조차 힘들고 사람들은 우왕좌왕 난리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취재기자와 급히 차에서 내려 스탠드업을 촬영했다.

  “제 뒤에 보이시는 것처럼 마을은 폐허로 변해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불안과 걱정으로 오늘 밤을…”

  기자가 현장에 와서 취재를 하고 있다는 얼굴 도장은 찍었으니 이제 현장 그림이 있어야 뉴스를 완성할 수 있다. 주변의 일본 기자들에게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을 묻자 십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동네를 알려주기에 곧장 출발했다.


  도착한 곳은 처참했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차라리 영화 세트장에 가까웠다. 일본 특유의 목조주택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있고 귀여운 경차들은 에프킬라에 직격 당한 벌레들처럼 바퀴를 하늘로 향한 채 뒤집혀 있었다. 폐건물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시신 수습은 시도조차 못하는 상황으로 보였다.

  프로는 흥분하지 않는다. 최대한 냉정하게 필요한 내용들만 서둘러 스케치한 뒤 협력사인 후지TV의 위성 중계차가 있는 장소로 네비를 찍고 시동을 걸었다. 차 안의 3명은 눈앞의 참담한 현실과 촉박한 송출 시간에 대한 걱정으로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8시를 넘기자 주변은 캄캄해졌다. GDP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지만 전기가 끊긴 일본의 밤거리는 헤이안 시대와 다를 바 없었다.


  주변에 움직이는 물체라고는 우리 밖에 없다. 사람도 없고 소리도 없다. 불길할 정도로 조용하다. 거대한 암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좀비 영화라면 여기저기서 뭔가 튀어나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취재 차량의 전조등 불빛 하나에 의지해 조심조심 네비가 알려주는 대로 좌회전을 하는 순간…! 차 안의 3명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왕복 4차선의 시내 도로 한복판에 거대한 선박이 길을 틀어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미셸 공드리도 상상해내기 힘들법한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모습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4차선 도로를 꽉 메운 어선 한 척이라니, 자연 앞에서 인간은 이 얼마나 무력한가. 쓰나미에 휩쓸려 시내 중심지까지 휩쓸려온 배를 보고 있노라니 머릿속에 몇몇 단어들이 떠올랐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세계 멸망… 즐겨보던 서브컬처의 한 장르였을 뿐인데 정작 두 눈으로 이런 상황을 보게 되니 그 위압감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2008년 출시한 PC게임 <폴아웃3>는 세계를 멸망시킨 핵전쟁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 간에 극한의 생존 투쟁을 다룬 작품이다.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한 대지에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건물들, 핵폭발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기형적으로 변한 인간들, 방사능에 오염되어 근처조차 갈 수 없는 강과 바다, 우중충한 하늘. 우리가 원래 사용하던 화폐는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고 노예나 인육마저 거래되는 지옥도가 리얼하게 그려진다.


  핵전쟁을 피하기 위한 지하시설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19살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벙커 밖으로 나가 방사능으로 뒤덮인 세상을 떠도는 여정을 다룬 이야기. 각자의 욕망으로 점철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협력, 대립을 반복해가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투쟁인 것이다.



  <폴아웃3>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도에 있다. 액션 활극처럼 플레이하고 싶으면 주변의 불손한 사람들을 보이는 족족 제거하고 학살하면서 진행할 수도 있고, 정의의 수호자가 되고 싶다면 힘겨워하는 약자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그들의 걱정과 두려움을 해결해줄 수도 있다. 길은 모든 방면으로 열려있다. 빚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 직전인 청년의 고민을 우연히 들었다면 그냥 무시할 수도 있고 (얼마 후에 그의 부고를 듣게 된다) 돈을 건네 빚을 상환하라며 호의를 베풀 수도 있고, 빚쟁이를 찾아가 무력으로 화끈하게 협박해 처리해줄 수도 있고, 밤에 몰래 빚쟁이의 숙소에서 대출 장부만 훔쳐 도와줄 수도 있다. 심지어는 빚을 약점 삼아 청년을 괴롭히는 것마저 가능하다!


  ‘법과 정의’ 같은 고상한 단어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증발해버린 핏빛 대지에서 펼쳐지는 서바이벌. 이런 작품인 만큼 <폴아웃3>를 진행하다 보면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감정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주말이 되면 4인 가족이 마당에 모여 소시지를 굽고 캐치볼을 했을법한 교외의 예쁜 전원주택. 그 안을 살펴보면 침대 위에는 서로 손을 맞잡은 채 곱게 누워있는 두 구의 시신이 놓여있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이미 해골이 되어버렸지만 그들 옆에는 꾸리다 만 여행 가방과 옷가지가 그대로 널브러져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대피를 시도하다 결국 모든 걸 단념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차분하게 운명을 받아들인 이들의 최후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가족사진이나 편지에 적힌 서로에 대한 사랑과 걱정, 안부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울컥해진다. 그러다가도 혹시 집 안에 남겨진 통조림 캔 같은 게 없는지 주방과 냉장고를 뒤지는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혼자 하는 게임인데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옷장 속에는 생전에 고인이 입었을 게 분명한 멀끔한 정장이 한 벌 들어있다. 험한 길을 다니느라 닳고 헤진 내 캐릭터의 옷보다 튼튼하고 좋은 옷이다. 분명 고인들의 소중한 유품임에도 허겁지겁 꺼내 챙겨 둔다.

  살아남는다는 게 무엇인지, 이렇게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꾸역꾸역 연명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근원적인 고민을 계속하면서도 터벅터벅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어디를 가도 생명의 흔적보다는 죽음과 소멸의 냄새만 가득하다. 폐허가 된 관공서와 지하철, 살아남은 사람들이 얼마간은 피신했겠지만 이제는 쓰레기와 부서진 카트만 가득한 대형마트, 땔감으로 썼는지 찢어지고 불에 그을린 책만 나뒹구는 도서관. 이런 모습들은 <폴아웃3>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잘 세팅된 배경일뿐이었다. 작품 속의 세상. 그런데 이런 세기말적인 모습이 모니터가 아닌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순간이었다.



  충격은 충격이고 업무는 업무다. 회사원은 강하다. 선박으로 틀어 막힌 도로를 우회해 가까스로 중계차에 도착했고 방송시간 일보직전, 취재한 내용을 무사히 서울로 송출했다. 3명 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주차가 힘들어 마지막엔 꽤 뛰었다) 수고했다며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거대한 참사에 휩싸인 일본의 상황을 정제된 외신이 아닌 우리만의 시선으로 한국의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한 것으로 오늘의 임무는 완수.


  그 후로도 며칠 동안 재난 지역 여기저기를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담았다. 어디를 가든 대재난의 후유증은 폐부를 찔러댔다. 역대급으로 자극적인 게임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픽션이 아닌 실존하는 ‘어떤 것’들이 현실 세계에는 넘쳐났기 때문이다. 절망으로 가득 찬 공기, 한숨과 재로 뒤섞인 먼지 냄새, 사랑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잃은 초점 없는 눈동자가 매일같이 우리를 짓누르는 나날이었다.

  현실은 게임보다 무겁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뢰한의 참회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