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모단 May 15. 2020

무뢰한의 참회록

PS4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2>


  1933년 일제강점기 시절에 지어진 경북대 의대 본관.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로 한 장씩 쌓아 올린 고색창연한 건물의 한 구석에는 법의학교실이 자리 잡고 있다.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느낌의 낡은 강의실. 그 옆 해부실은 CSI나 범죄 드라마에서 늘 봐온 푸르딩딩한 조명의 매끈한 은빛 공간이 아니라 약품과 책, 표본, 각종 도구가 어지럽게 놓여있어 조금은 산만하지만 정감 어린 옛 초등학교 실험실의 정취를 풍겼다.

    

  해부실 창밖으로 보이는 울창한 녹음에선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매미 소리가 요란했다. 뒤에 앉은 사람까지 잘 볼 수 있도록 계단식 단차를 둔 해부실의 한가운데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해부대가 하나 놓여있다. 영화에선 대부분 스테인리스 재질이던데 이곳은 도자기 느낌의 아이보리색 대리석 해부대였다. 분명 청결하게 관리하고 있을 텐데도 여기저기 가시지 않은 검붉은 얼룩과 눌어붙은 단백질 조각들이 이 방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칠판 옆으로는 미용실에서나 쓸법한 이동식 3단 카트가 있었다. 단, 놓여있는 물건이 헤어드라이기, 가위, 빗, 염색약이 아니라 전동톱, 메스, 드릴, 망치라는 게 다른 점이다. 모든 게 낯선 이곳에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이유는 오늘 취재하는 내용이 바로 ‘부검’이기 때문이다.


  단어에서부터 으스스한 느낌의 부검. 날로 증가하는 미제 강력사건이나 변사, 고독사 때문에 사망 원인을 파악하는 일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데 현장의 부검의는 너무나 부족하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국의 부검의가 고작 40~50명에 불과해 한 해 사망하는 변사자의 수요를 공급이 도저히 못 따라가고 있는 실정.

  범죄 여부나 재판, 보상, 보험금 등 실무적인 부분은 물론 떠난 이와 남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중요한 일인 건 맞지만 의사들 입장에서는 격무와 스트레스, 말도 못 하게 열악한 처우 등으로 인해 어지간한 사명감 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수능 정복 끝에 의대생이 된 이상 피부과나 성형외과 개원의가 되어 자본주의의 정점에 서고 싶지 누가 매일같이 변사체나 파헤치면서 박봉에 시달리고 싶겠는가.


  상식적으로 보면 이상한 사람들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부유해질 수 있는 꽃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마다하고 가시밭길을 선택한 사람들. 부검의들이다. 독하게 마음먹지 않고서는 엄두도 못 낼 직업을 선택한 이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정부 정책이나 제도적으로 어떤 개선점이 필요한지를 취재하러 온 출장이었다.


  함께 온 선배와 부검 담당 교수는 시신 인수 수속 때문에 의대생 한 명과 나만 해부실에 먼저 들어갔다. 햇살이 눈부신 8월의 아침인데도 생전 처음 들어와 본 해부실의 위압감은 사뭇 강렬했다. 1933년도에 만들어졌으니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 부검대 위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웠던 걸까.

  일제강점기였으니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모진 고문에 숨진 독립투사가 찾아왔을지도 모르고, 민주화운동 시기에 경찰의 곤봉에 맞아 세상을 뜬 대학생이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노동자가 왔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공간이다. 가슴 아프고 억울한 사연들, 부검의 선생님들의 노력 덕분에 가까스로 밝혀지고 드러난 진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아 의대생 친구와 얘기를 나눠봤다. 약간 피곤해 보이는 것 말고는 PC방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거 좋아할법한 너무나 평범한 대한민국의 20대 청년이었다. 본과 4학년이라는 이 친구는 교수님을 도와 거의 매일 같이 부검에 투입되고 있었다.

  평소에 ENG카메라를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그거 안 무거워요? 몇 킬로나 나가요? 가격이 얼마예요?’ 같은 전형적인 질문이 가장 귀찮고 지겨웠는데 나 또한 똑같은 걸 친구에게 물어보고야 말았다.

  “매일 시체를 보는 일인데… 안 무서워요? 악몽 꾸거나 그러진 않죠?”

  친구는 너무나 예상 범위 내의 질문이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전혀 그렇지 않다 대답했다. 의대생이니 평소의 해부 실습이랑 큰 차이 없기도 하고, 망자에게 분명 의미 있는 일인 만큼 혹 나온다면 악몽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하러 꿈에 찾아오지 않을까 한다는 대범한 답변에는 조금 놀랐다.


  하루 종일 부검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을 타면 옷과 몸에 배어든 시취 때문에 주변 승객들이 인상을 찌푸리거나 코를 막으며 슬금슬금 피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힘든 일이 없다는 얘기를 듣다 보니 숭고함이랄지 부검의의 긍지 같은 게 느껴졌다. 그렇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묘한 호기심이 동했다.

  “의대생 선생님은 여기에 누워보셨어요?”

  “해부대에요? 아뇨? 거기 제가 누울 일은 아직…”

  “혹시 제가 여기에 잠깐 누워 봐도 될까요? 실례되는 일인가요? 규정에 어긋난다거나, 방해된다거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정말요? 괜찮으시겠어요?”


  별 괴상망측한 일도 세상에 다 있다는 표정으로 학생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해부대 위에 올라 몸을 뉘어 보았다. 똑바로 눕자 천장에 달린 연근조림 모양의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피부에 닿는 대리석의 감촉은 여름인데도 서늘했다. 집에서 쓰고 있는 싱글 침대와 거의 같은 면적의 직사각형. 천하를 호령하던 왕후장상도 세상을 떠날 때는 결국 이 좁은 공간에 올라와서 마지막 의식을 치르겠구나.


  삶이 끝나는 날, 언젠가는 올라오게 될 곳.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 자리를 다시 찾게 될까. 무엇을 세상에 남기고 떠날지, 뭔가를 남기긴 할지, 그때의 모습은 따뜻할지 아름다울지 표독스러울지… 아무것도 예측이 안 된다. 이곳에 먼저 누웠던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지 헤아려 볼 요량으로 가만히 눈을 감아 보았다.




  (아래에는 <레드 데드 리뎀션2>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899년 미국은 ‘서부개척시대’ 라는 대단원의 막이 서서히 내려오는 시기였다. 우리에겐 영화로 익숙한 카우보이들의 활약, 인디언들과의 영토 분쟁, 역마차를 터는 갱단, 악을 응징하는 황야의 7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양팔로 서로에게 총을 겨누며 대치하는 멕시칸 스탠드오프…

  웨스턴 역사에 진한 족적을 남기며 한 시대를 풍미하던 범죄자들은 산업화시대의 태동과 함께 하나둘씩 보안관에게 붙잡히거나 현상금 사냥꾼에 쫓겨 점점 외곽으로 도망치게 된다. 낭만과 야만이 공존하던 시절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주인공이 속한 ‘반더린드 갱단’은 이름과는 달리 잔악무도한 싸움꾼들만의 집단은 아니다. 무법자, 반체제인사, 무정부주의자, 사회 부적응자, 도망자는 물론 흑인, 멕시칸, 인디언 등 사회의 마이너리티들이 모여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일종의 대안 가족이다. 남녀노소 20~30명에 달하는 이 방랑자들은 절도, 열차 강도, 현상금 사냥, 동물 포획 등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며 갱단을 유지하려 노력하지만 좁혀오는 정부의 수사망과 적대적 갱단의 공격에 하루하루 쫓겨 다니는 신세로 전락한다. 위험한 임무 도중에 동료를 잃기도 하고, 도망 다니는 스트레스로 인한 멤버들 간의 갈등과 불화, 특히 리더인 ‘더치’의 변심과 타락 때문에 갱단은 자멸의 길로 치닫는다.



  갱단 창립 멤버이자 더치의 오른팔인 이 작품의 주인공 ‘아서 모건’은 어마어마하게 걸린 현상금만큼이나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총잡이다. 갱단에 애착이 강해 궂은일에도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고 단원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주저하는 법이 없다. 혈육 하나 없이 홀로 황야를 거닐던 외톨이 아서에게 갱단원들은 가족이고 형제이자 삶의 전부인 것이다. 밤하늘 아래 화톳불을 켜놓고 단원들과 함께 노래 부를 때 그의 얼굴은 행복 그 자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도망자 신세지만 동료들이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

  그런 아서는 어느 날, 갱단의 사채를 빌린 채무자에게 빚 독촉을 (좀 과격하게) 하던 중 튄 상대의 핏방울로 인해 결핵에 걸려버린다. 지금과 달리 1899년의 결핵은 높은 치사율의 무서운 불치병이다. ‘서부 액션 활극’을 표방하는 것처럼 보였던 게임은 이때부터 좀 다르게 흘러간다.


  아서의 안색은 하루가 다르게 창백해지고 눈은 충혈되며 볼은 핼쑥하게 꺼진다. 발매 당시를 기점으로 그래픽만큼은 가장 뛰어나다 해도 지나치지 않은 작품인 만큼 아서의 병색은 4K 화면을 통해 처절할 정도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건장한 역삼각형 체구에 어디서나 당당함과 위트가 있었고, 제도권 밖의 삶이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으며, 여성과 아이들에겐 따뜻함을 잃지 않았고, 목소리엔 위엄과 기품이 있던 아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침이 잦아진다. 쿨럭쿨럭!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기침의 빈도는 늘어 동료들과 대화조차 힘들어지고 호흡은 점점 거칠어진다. 결국 길 한복판에서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가는 지경에 이른다.



  사신이 다가오고 있다. 아서는 분명히 느낀다. 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때문에 슬슬 결정해야 한다. 황야의 건맨으로 살아온 인생의 마무리는 과연 어떻게 지을 것인가. 주변 상황은 순탄치 않다. 강인하게 패밀리를 이끌어야 할 리더 더치는 판단력이 흐려져 단원들을 위험 속으로 빠트리고, 갱단을 정부에 팔아먹으려는 배신자들만 더치 옆에 찰싹 붙어있다. 탐정사무소 요원들은 코앞에까지 들이닥쳤고, 동료들은 형무소에 갇혀 있으며 아서의 몸 상태는 콜록대다 못해 이제 각혈을 하기에 이른다.


  2018년 미국에서 발매된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2>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참회록’이다. 무법자의 참회록. 이제껏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지만 막바지에 이르러 삶을 반추하고 반성하는 한 남자. 가정환경과 여러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악당의 길을 걷게 됐지만 침대 옆에는 항상 어머니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 한 송이를 두었고 시간이 날 때면 서부의 광활한 대자연을 스케치북에 그림으로 남기던 사람. 아무 이유 없이도 곤경에 빠진 한 가족을 도울 수 있는 사람.



  작중에 등장하는 인디언 족 추장 레인즈 폴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변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본성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거라네” 하는 일이 일인지라 까칠하고 냉소적인 가면을 깊게 눌러쓴 채 잘못된 길을 걸어왔지만 무의미한 살생과 충돌은 가능한 피하려 했고 어쩔 수 없는 싸움 후에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항상 괴로워하던 아서.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기차역에서 칼데론 수녀를 만난 아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인에게 진심을 털어놓는다.


  “전 죽어가요 수녀님.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옮았어요. 사람을 죽도록 때리다가. 고작 돈 몇 푼 때문에요. 난 지독하게 살아왔습니다 수녀님.”

  “우리 모두가 지독한 삶을 살지요 모건씨. 우리 모두 죄를 짓고요. 하지만 전 당신을 알아요.”

  “모르실 거예요.”

  “미안하지만 그게 문제예요. 모건씨는 자기 자신을 몰라요.”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모건 씨를 만날 때마다 당신은 늘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웃고 있었어요.”

  (…)

  “수녀님. 전… 두려워요.”

  “하나도 두려워할 거 없어요. 사랑이 존재한다는 데에 한 번 걸어 봐요. 그리고 그 사랑을 나눠 보세요.”

  “노력해볼게요.”


  결국 아서는 희생과 헌신의 화신이 되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구해야 할 사람들은 구하고, 없애야 할 악당들은 없앴으며 은혜와 원수는 갚는다. 선과 악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평생 방황하던 그였지만 할 수 있는 걸 다 이루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많은 유저들이 긍지 가득한 아서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며 눈물 흘렸고 게시판에는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마지막 내용을 발설하지 말자는 암묵적인 룰까지 생겼다. 한 번 엔딩을 본 이후에 두 번째로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게임 내용은 진행하지 않고, 즉 스토리는 그대로 멈춰둔 채 아서와 함께 유유자적 서부 생활만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과 강으로 여행 다니고 친구 같은 말 등을 토닥여주며 낚시와 사냥을 즐기는 캠핑 라이프.


  사람에 치이고 회사에 지치고 지하철 2호선 출퇴근길의 압박에 숨조차 꺽꺽대다 집에 돌아오면 <레드 데드 리뎀션2>의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말 위에 올라타 초원을 힘껏 내달리다 보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밤, 산 중턱 모닥불 앞에 홀로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담배 한 대 피워 물면 전전긍긍하던 세상만사 걱정거리들이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지던 나날. 참 고마운 게임이 아닐 수 없다.


  운명의 모래 폭풍에 휘말려 그가 원하는 대로 살아온 인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결말’ 만큼은 자신의 의지대로 지어 보이겠다는 굳은 의지. 아서는 그런 길을 모두에게 묵묵히 보여줬다.

  우리 떠나는 순간도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백만 명이 울고 단 한 명만 웃는 전쟁이라는 슬픈 게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